옆지기는 아들과 따로 '아빠들과 아들들'끼리 비무장지대 인근에 놀러가기로 결정된 석가탄신일. 딸과 오붓하게 뭘하고 놀까 고민하다, 정말 혹시나 해서 물었습니다. 백제 유적 답사 구경갈래? 아주 가끔 가는 포럼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마련한 걸 떠올렸는데, 까칠한 중학생 딸이 그리 쉽게 답할지 몰랐죠. 뭐, 요즘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 걸 아는 엄마의 꼼수였을지도 모르지만.
쉬는 날, 어디 가볼까 하는, 흔한 엄마의 고민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한성백제 유적 답사는 기어이 여기에 기록을 남길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5시간 넘게 걸었는데, 딸도 크게 투덜대지 않았으니 재미났던게 분명. 그와 상관 없이 제가 백제에 홀렸습니다. 워낙 무식했던 탓에 새로운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덕분이죠.
일단 한성백제박물관이란게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웅장합디다. 답사를 이끌어주신 분은 한신대의 국사학자 권오영 선생님. 백제 유물 발굴 담당으로 직접 현장을 누비고 다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찌 재미있지 않았겠습니까. 박물관 들어서자 마자 저 바닥지도를 통해, 백제 유물의 흔적이 어디 어떻게 남아있는지 보여주시는데 내심 놀랐어요. 조선왕조 500년에 서울이 600년 된 도시인양 생각했는데, 2000년 역사라니요.
박물관에 들어서면 바로 아래 사진 저 벽이 보입니다. 풍납토성. 흙으로 만든 성입니다. 너비가 43m, 높이가 11m, 둘레가 3.5km에 달한답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기억 있는 고구려 궁내성 보다 큰 규모라고 합니다. 나무 상자에 흙을 꼭꼭 다져넣어 차곡차곡 쌓았는데 연인원 300만이 동원된 규모랍니다. 당시 인구가 6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저렇게 노동력을 동원하다니, 상당히 강한 왕국이었다고 할까요. 중요한 건, 백제가 어디서 건국되었나를 놓고 학계 논쟁이 뜨거웠는데, 풍납토성 발견으로 싹 정리됐답니다. 백제는 한성(서울)에서 출발한 한성백제 시기를 거쳐 이후 공주, 부여로 간 거죠. 아래 저 벽은..실제 복원된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아래 사진 왼쪽 키 큰 남자는 영국에서 온 훈남 Harry. 백제 역사와 건축을 공부한다네요. 저 분 보다 제가 아는게 적어요. 부끄ㅋㅋ)
박물관엔 어느 박물관에서 보이는 토기, 장신구 등등 빤한(?) 혹은 지루한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를 알아보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듯. 하지만 이날 저희에겐 선생님이 계셨잖아요. 최고의 선생님.
저 흔한 유리구술에 숨겨진 비밀이랄까? 예컨대 작은 상자안에 들어있는 작은 구슬은 유리 위에 금박을 입힌 아이들입니다. 또 목걸이 중간에 쓰인 무광택 붉은 아이들이 좀 있는데..'메이드 인 백제'가 아니란 겁니다. 고고학자들은 저 구슬이 인도에서 베트남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넘어가는 흔적을 탐구합니다. 저 구슬이 아제르바이잔 같은데서 발겨되면 또 쾌재를 부르는 거죠. 3~4세기 백제가 상당히 개방된, 타국과 교류가 활발한 나라였다는 증거도 됩니다. 실제 백제는 진정한 다문화 국가의 효시. 주변 민족과 문화를 대범하게 품어낸 사회였다네요.
아래 오른쪽 사진은 백제의 문화 수준을 상징합니다. 돌절구, 저 아이가 어디에 쓰인 물건일까.. 학자들은 차를 찧는 도구로 본답니다. 신라는 9세기 무렵에나 차 문화에 빠지는데 백제는 3세기에 이미 차를 음미했다는 거죠. 뒷편 커다란 항아리는 '메이드 인 차이나' 랍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복어뼈 흔적이 발견됐답니다. 과연 뭘까요? 뭘 저장해놓았을까요. 일행 중 여성 한 분이 맞췄습니다. '젓갈'. 물론, 이 모든건 고고학자들의 추정치입니다만, 복어젓갈을 먹은게 아닐까? 하는 거죠. 그런데 복어가 어디 간단한 물고기입니까. 독성분 빼고 그걸로 젓갈 먹을 수 있는건..신분이 높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이게 발굴된 풍납토성이 만만한 인물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구나, 하는 거구요. 추론과 상상이 이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재미난지 역사학으로 인생이모작 전공을 바꾸고 싶을 지경.
무덤에서 토기가 별로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문화 수준이란 해석도 있네요. 신라는 고분 마다 엄청 나왔답니다. 그런데 장례 때 무덤에 쓰지도 않은 새 그릇들을 왕창 넣어주는 것과, 쓰던 물건 약간 넣어주는 것과 어느 사회의 수준이 높은거냐.. 란 질문을 던져보는 거죠.
박물관에 전시된 일부는 '모조품'입니다. 주로 일본에 '원본' 있는데, 백제에서 건너간 걸로 추정되는 것들이죠. 아래 바둑판이 대표적인데요.. 저걸 원본 그대로 복원하는데....1억5000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백제 스타일' 대단하지 않나요? 바둑돌집은 정교한 거북이. 그런데 또 옆에 문양 보면 낙타도 나옵니다. 옆의 바둑판 함은 육각형 문양인데, 이건 이슬람 특징이라네요. 그래서 또다시 백제가 글로벌한 문화를 품는 사회였구나 하는 거죠.
모조품들 사연도 하나하나 잼나요.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원본은 일본 국보 1호 목조 반가사유상이라네요. 우연히 부러진 목상의 손가락 하나로 그 나무가 무엇인지 조사하자, 그게 한국산으로 나왔는데, 산지는 경상도, 그러나 기술은 백제인거 같다는 사학자들의 추론, 재미있지 않나요? (관련 글 찾았어요) 모조품 칠지도도 있는데, 이건 찾아보니 아예 책으로 나올 만큼 사연 많은 거로군요. (왜 백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있을까)
박물관 구경하실 때, 옥상 놓치시면 안됩니다. 정말 뷰가 끝내주더군요. 조망을 했다면, 이번엔 걸어야죠. 박물관이 올림픽공원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하철 역 이름 정도로 알던 '몽촌토성'이 2000년 된 백제의 성이였고, 그게 사실 올림픽공원 산책로 수준으로 바뀐건 몰랐습니다. 그나마 공원이 되어 의미는 이상하지만, 훼손이 덜 된걸 고맙다고 하시는데 말이죠. 정말 끝내주게 멋있습니다. 성벽의 선들도요. 서울에 이런데가 있었다니. 저기 가는 도중, 진짜 황당했던건 말이죠.. 청동 조각상이 있더라구요. 위인 같길래... 흠, 몽촌토성 발굴에 애써준 누군가인가? 라고 보는데.. 박세직 동상. 축시 이어령.. 이더군요. 딸이 누구냐고 묻길래..어어, 올림픽조직위원장..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았어요. 훌륭한 분인지 여부를 떠나, 이 엄청난 공간의 주인 마냥 유일한 청동 조각상으로 기념하는건 촌스럽지 않나요.
공원 내 몽촌토성을 걷더니, 다음 코스는 풍납토성이랍니다. 박물관 1층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벽의 실물. 차를 타고 이동했어요. 1km 좀 안되는 거리라 일행 일부는 걸어서 갔어요. 영파여고 후문에서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죠.. 그리고 풍납토성 유적지의 맨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기 아파트 아래 둔덕이 풍납토성 입니다. 실제 아파트 건축 과정에서 유적이 발견됐고, 아파트 건축에 나선 이들과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적지가 나오면, 그거 발굴 비용 등이 고스란히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저기 아파트 짓는 분들에게 돌아간다네요. 날벼락이죠. 더구나 유적 발굴하느라 건축 시간 늦어지죠.. 아주 험한 꼴 많았답니다. 불도저로 밀고 들어간 주민 한 분은 처벌받았고, 무튼 결론은 아파트는 일단 짓고, 나머지는 나중에 발굴하기로. 짓는 과정에서 나온 일부만 박물관에 옮겨놓거나 복원한겁니다. 이 일대 백제 유적지는 대개 4m 정도 아래 있답니다. 저 동네 어딜 파도 4m 이상 파면 유적 나올 가능성이 높은 거죠. 학자들은 영파여고 이사가기만 바란다네요. 거주지야, 보상 문제가 넘 복잡하니까, 학교 이전시 학교 운동장 파겠다는 거죠.. 저기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네 놀이터 마냥 소박한 곳이 유적지 입니다. 파내지 못한채, 일부만 갖고..더 파면 뭐가 나올거라 하는 거. 그나마 개발에 덜 밀린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유적 발굴에 힘을 실어준 덕분이라나. 개발에 힘을 실어주는 정부에선 전국 방방곡곡 유물 발굴해봐야, 몇 점 남기고 다 쓸어버린다네요. 다만, 한쪽만 볼 건 아닌지라.. 저 동네 주민들은 재개발 희망(?)도 별로 없이 유적지 주변이란 이유로 재산 가치가 줄어드는 상황. 무슨 죄인가요.
석촌동 적석총은 이날 마지막 코스. 풍납토성에서 차를 타고 평범한 서울의 길을 따라 가다 어느 틈에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들어서면, 바로 무덤입니다. 돌로 된 3층 제단 같아요. 규모가 그런데 꽤 큽니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대단한 무덤이었겠다 싶은 겁니다. 공원 자체가 묘한 분위기가 도는게, 참 좋더라구요. (사진을 워낙 못 찍었어요. 큰 무덤 사진은 모퉁이에서 찍으라는 조언을 늦게 들었고, 역광에다..엉엉)
저런 무덤이 1920년대 기록에 따르면 방이동 석촌동 가락동 일대에 290 여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 처음 봅니다. 대단한 유적인데 왜 그럴까요. 지금 몇 개가 남아 있냐고요? 5개 남았답니다. 290여 개중 고작 5개요. 일단 한국전쟁 때 훼손되기도 했지만 1960년대 항공사진에도 꽤 남아있던 저 분묘들은 이후 개발에 싹 쓸려 나갔답니다. 아래 사진이 남아 있는 것 중 큰 건데, 더 큰 것도 사진 상에는 있었다네요. 그리고 현재 저 분묘는 3층이지만, 원래는 7층 돌 무덤. 사람들이 돌을 가져다 집 짓는데도 쓰고, 뭐 그냥 그렇게 훼손되어 갔답니다. 그게 세월이지요.
어느 무덤은 저리 돌 무더기만 남고, 더 작은 것도 있고. 그런데 290여개가 있었다는 건, 대충 세 배에서 네 배, 즉 1000여개가 넘는 분묘가 이 지역에 있다는 의미랍니다. 앞서 설명 들었듯, 유적은 최소 4m 아래 있다잖아요. 저 동네 분들은 백제 유적 위에서 세월을 쌓는 거죠.
듣다보니, 박정희 시대에는 신라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일이 많았답니다. 경주를 최고의 옛 도시로 만들어준 거죠. 상대적으로 백제는 조금 덜 발굴, 발견됐구요. 전두환 시대에는 가야 문명에 힘을 실어줬다네요. 이건 꼭 유적 발굴과 연구에 예산을 실어줬느냐의 문제만은 아닌게, 아무래도 아파트 짓고 공장 짓다 보면..개발하다보면 유적이 나오게 마련인데, 백제 쪽은 아예 그게 덜됐던 거죠. 서해안 시대 외치면서부터 백제 유적이 심심찮게 나오긴 한답니다. 물론 아까 들었듯, 대개 불도저로 밀고 조금만 건진다지만. 백제 연구하는 권오영 선생님은 '한성백제'의 역사에 애정이 많으시더군요. 하기야, 옆 나라 신라보다 세련되고 타 민족에게 너그럽고, 문화란 걸 존중하던.. 아주 오래된 우리 조상들. 매력적이잖아요.
이런 서울에서 우리가 사는 겁니다. 서울 여행, 올림픽 공원의 박물관과 몽촌토성, 풍납토성, 적석총으로 이어지는 이 반나절의 여행, 인연이 닿는 분들은 놓치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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