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렸을 때엔 여행을 가지 않았다. 휴가만 갔다. 수영장만 있으면 좋았던 휴가. 이제는 아이들과 여행을 다닌다. 고마운 일이다.
<남도여행-1> 남도로 가는 길, 마이산 탑사의 고요한 염원
덕분에 이런 시간도 갖고, 이번 여행은 어린 아이들과는 절대로 못할, 사찰 기행도 포함됐다. 첫날 마이산 탑사를 비롯해 5군데의 절을 찾았다. 어쩌면 그리 다른 모습들로 맞아주는지 고맙기도 하지.
<일정> 5월3일(토) 채석강을 그야말로 휘리릭 본 뒤, 곰소 염전 거쳐 내소사로 출발. 정읍서 점심 회동. 담양으로 이동해 메타세콰이어 사람이 너무 많은데 질려 소쇄원과 명옥헌! 5월4일(일) 아침 서둘러 메타세콰이어 재도전. 죽녹원 감상. 화순 운주사와 고인돌 공원, 광주로 넘어와 망월동 국립5.18 민주묘지 참배. 5월5일(월)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그리고 낙안읍성! |
부안 내소사는 전나무 숲길이 열어준다. 빽빽한듯 여유로운 전나무 사이로 시간도 느릿느릿 흐르는 느낌. 청량한 기운을 온몸으로 맞았다. 숲처럼 나무 울창한 길을 걷는 건 좋은 점 밖에 없다. 산을 오르는 길처럼 얼굴 빨개지도록 헥헥 거리지 않아도 된다. 타박타박 이어지는 발걸음마다 소박한 기대와 편안한 안도감이 함께 한다. 이번 여행은 각 절로 들어서는 길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매혹했다. 특히 내소사의 전나무 길은 볕좋은 봄날, 서늘한 바람과 함께 좋았는데...둔중한 여인이 등장하는 저 사진 밖에 없다니 아쉽.
633년 백제의 승려가 지었다는 내소사에서 만난 건축물(이때까지는 이름도 잘 모름)의 전각이 인상적이었다. 채색이 세월에 바래 소박한 나무색이 드러났다. 화장을 지운 맛이 또 묘하더라. 탑사에선 탑에 취했다가, 내소사에서 비로소 연등의 선명한 행렬에 눈길이 갔다. 쨍하게 밝은 봄 날, 땡땡이 그림자까지 더하니 예술작품. 부처님 오신날은 이번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 고마운 날이자, 가는 절마다 생동감을 더했다. 딸은 세월호 실종자 무사귀한을 위해 노란 리본을 달았다. 함께 간 K의 딸 Y는 절 마다 불상 앞에 엎드려 무언가 빌었다.
화순 운주사 부터는 가이드 선생님의 영도 아래 여행의 질이 달라졌다. 국내 최고의 건축 전문가이자 글쟁이인 구본준님 가족이 둘째날 합류한 덕분이다. 가는 곳곳 역사와 공간을 넘나드는 스토리가 쏟아졌다. 사실 일행 중 K도 국제 이슈에다 세계사, 고고미술사에 조예가 깊고, S선배는 동양사를 꿰고 있는 동아시아 전문가. 옆지기도 남도를 여러 차례 누빈 바, 구라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데, 요즘말로 일행의 클라쓰가 이쯤되니, 여행은 재미 없기도 불가능할 지경. 사실 너무 좋았다. 진지한게 병인 나는 이럴 때 눈 휘둥그레 귀 쫑긋 참한 학생이다.
운주사는 천불천탑의 절이다. 아담한 석탑, 둥근 석탑 온갖 탑들에 표정도 모양새도 각기 다른 불상들이 곳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잡고 있다. 현재는 석탑 17기, 석불 80여개가 남아있다는데 국내에서 가장 큰 와불, 누워있는 불상도 평화롭다. 와불이 벌떡 일어난다면 세상이 뒤집힌다는데, 아직은 관망 중이신듯.
조금 무엄하기도 하지만, 귀엽게 넘어가주면 고맙겠다. 사실 운주사의 불상들은 엄숙하고 경건하다기 보다 다들 귀엽고 재미난 기운을 전한다. 묘하다.
운주사는 안쪽의 언덕을 올라가면, 사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니 근방 잘생긴 산들이 지켜주는 천불천탑의 영지가 한 눈에 보인다. 굽이굽이 능선을 살피며 땀을 씻는 바람에 몸을 맡겨본다.
어쩐지 유머러스한 운주사와 달리 순천 송광사는 사뭇 진지하다. 구본준님에 따르면 불가의 세가지 보물, 삼보(三寶) 사찰 중에 송광사는 승보(僧寶) 사찰. 법보(法寶) 사찰인 합천 해인사에는 법전 중의 법전 팔만대장경이, 불보(佛寶) 사찰인 양산 통도사에는 부처님 진신 사리가 있다면 송광사는 그야말로 '스님'들의 본산이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부터 시작, 조선 시대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했다고 한다.
들어가는 문부터 뭔가 포스가 남다른 것 같아 한 컷. 연등도 제대로 화려했다. 볕 좋고 맑은 날, 어딘지 고아한 느낌의 사찰에서 총천연색 때깔이 빛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저 나뭇배 처럼 생긴 큰 통에 놀랐다. 비사리구시. 1724년 태풍에 쓰러진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느티나무. 사리함을 만들던 느티나무를 사리나무, 싸리나무로 혼용했다는 얘기를 보았다. 국가 제사 때 백성들을 위해 밥을 담아두는데 쌀 7가마, 4000명 분의 밥이 들어간단다. 인근 백성 4000명을 돌보는 도량, 그 시절 국가가 그랬던가.
순천 선암사는 송광사에서부터 훌륭한 트래킹이 가능한 모양이지만, 시간을 아껴 차를 타고 들어갔다. 선암사로 들어가는 길은 계곡물과 함께 이어진다. 그래서 가다보면 보물 400호 '승선교'라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나온다. 물에 비친 그림자를 이용해 완벽한 원형으로 찍은 사진도 구경은 했지만 옆지기 작품은 요 정도. 사실 계곡 아래 내려가는 길이 그리 쉬운 편은 아닌데 좀 좋아 보이는 카메라 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구도를 잡는 모양새.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다스리는 절에서 한 컷 건지겠다고 애쓰는 그 마음들이라니.ㅎㅎ
물길 따라 들어가는 길은 아무리 봐도 멋스럽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 길에서 벗어나 계곡의 돌 무더기를 건너뛰며 신이 났다. 그러고보면, 절은 참 너그럽다. 경내에 들어가기 전 행동가지로 뭐라 않는다. 물론 너무 관대한 나머지 절 들어가는 길에 좌판과 식당도 많은 거겠지만..ㅠ
선암사 가는 길, 우리는 시 한 편을 검색해서 읊어댔다.
선암사 해우소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구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쌍기역이 아니라 'ㅅ+ㄱ'으로 '깐뒤'라 쓰인 곳이 해우소, '뒤깐'이다. 옆은 나무 칸막이가 있지만 앞은 트인 화장실. 우리 일행 중 누구도 볼일을 시도하진 못했다. 통곡도 하지 못했지만, 그저 웃고만 지나갈 수도 없었다. 누군가 눈물 흘리며 달려올 수 있는 그 해우소. 누구든 품어내고 달래주는 선한 공간. 마음이 저절로 차분해진다. 선암사 뒷편에서는 잘 생긴, 오래된 매화나무도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준다. 고즈넉한 기운은 절의 기본 덕목 아닌가. 선암사에서는 해우소 시 덕분에, 오며 가며 걷는 길에 딸이 최근 외운 시를 들려줬다. 조지훈의 시. 아름다운 말들을 중딩 딸이 외워서 들려주는 경험, 이건 비교할 수 없는 근사한 일이다.
내소사, 운주사, 송광사, 선암사..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부처의 품으로 안아주셔서 고마웠다. 4.16 참사의 비명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다. 절마다 절마다, 부처 앞에 서서 믿음도 없이 그저 빌었다. 생의 귀환을 빌고, 깊은 안식을 빌고, 죄 많은 어른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빌었다. 의식이나 예, 격식 없는 기도가 어딘가 닿기를 바라며 틈만 나면 빌던 시간들. 어쩌면 그런 기도로 가당찮게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여행에 덜 미안하고자 했다. 어찌됐든 이 여행에서 좋았던 기억의 한 축이다.
이 여행을 기억할 때 마다, 세월호 친구들을 또 기억한다. 인간의 존엄, 생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주고 떠난 아이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거듭 전한다.
====> 다시 사족처럼 붙이는 식당 정보.
구본준님이 "꼭 그 곳에서 만나야 한다"고 강추했다. 우리는 내소사에서, 본준님네는 서울에서 달려와 만난 곳이 정읍 백학정. 떡갈비 한상 차림 훌륭하다. 다소 만만찮은 가격이기도 했고, 너무 과한 밥상도 겁나서 적당히 적게 섞어서 시켰는데 그래도 좋다. 다들 허기진 와중이라 급히 찍느라 흐릿..ㅠ 이후 목적지 주변에서 끼니를 해결하다니 맛탐험가로서 체면을 구겼다만..왼쪽 아래 사진은 운주사 바로 앞 민속정의 산채비빔밥(7000), 오른쪽 아래 사진은 송광사 앞 식당들 많은 와중에 벌교식당이던가. 1만원 초반대 산채정식이었던듯. 툴툴 거려도 어디나 기본 이상은 하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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