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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미디어>주류 언론이라는 괴물들의 특성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 중에서

첩보소설 보다 더 흥미진진한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

민권 변호사 출신의 탐사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 사진) 국가 감시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지구적 논란을 촉발시킨 스노든 사건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내용이 구구절절 흥미롭지만, 오늘 점심시간에 읽은 부분은 언론에 대한 이야기.






 

흔히 '정론지'가 없는 우리 사회를 아쉬워할 때, 정론지 상징처럼 얘기하는게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정도십수 년 전에 국제부 기자로 일했던 시절에도 이 두 매체는 '정론' 삼아 보곤 했다다만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전쟁 등에서 이들 매체가 보여준 스탠스는 깜짝 놀랄 만큼 편파적이어서 당황했다우리가 알던 정론이 이런건가

글렌 그린월드가 쏟아내는 비판은 훨씬 더 강력하다. 인용해서 퍼나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워싱턴포스트>는 주류 언론이라는 괴물의 핵심. 미국 내에서 정치 매체가 가진 최악의 속성들을 모두 구현하고 있다. 정부와 지나치게 가깝고, 국가 안보 기관을 숭배하며,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일상적으로 배제한다. <워싱턴포스트> 내부의 미디어 비평가인 하워드 커츠는 2004년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신문사가 어떻게 전쟁에 찬성하는 의견을 체계적으로 증폭시키면서, 반전 여론은 무시하거나 배제했는지에 대한 글을 썼다. 커츠는 <워싱턴포스트>의 뉴스 보도가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면서 눈에 띄게 편파적이었다고결론 내렸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설란은 지금도 미국의 군국주의, 비밀주의, 감시에 대한 가장 떠들썩하고 생각 없는 논리로 가득하다…  

(정부와 지나치게 가깝고 국가 안보 기관을 숭배?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일상적으로 배제? 이것이 언론인가? 싶지만 실제 우리가 만나는 주류 언론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이다. 평소 잘 드러나지 않고, 평소 좋은 다른 기사에 묻혀서 잊곤 하지만, 예민한 이슈 앞에서는 이런 특성은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2004 <뉴욕타임스>는 소속 기자인 제임스 라이즌과 에릭 리치트블라우가 NSA의 무영장 도청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도할 준비가 된 후에도 무려 1년 이상 그런 사실을 숨겼다. 그 당시 부시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의 발행인 아서 슐츠버거와 편집장인 빌 켈러를 집무실로 불러 NSA가 법이 요구하는 영장도 없이 미국인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를 돕는 행위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뉴욕타임스>는 정부의 이런 요구에 따라 기사 발표를 15개월 동안 막았다가, 2005년 말, 그러니까 부시가 재선된 후에 보도했다. (따라서 부시가 영장도 없이 미국인들을 도청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재선에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 그때도, <뉴욕타임스>가 기사를 내보낸 유일한 이유는 낙담한 라이즌이 책을 통해 사실을 폭로하려 했고, 그런 식으로 자사의 기자에게 특종을 뺏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NSA가 영장 없이 도청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묻어서, 선거 쟁점 조차 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은, 뉴욕타임즈에 대한 그동안의 신뢰를 싹 접게 만드는 수준이다. 대통령이 발행인과 편집장을 직접 불러 읍소? 테러리스트를 돕는다는 그 설명에? 예컨대 북한에 이롭다는 이유로 보도를 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도 다 저렇게 나올 것인가? 스노든의 폭로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이런 폭로를 왜 놓쳤나 모르겠다. 미국 정부의 오만하고 위험천만한 행위보다 더 무섭다)

주류 매체가 정부의 비리에 대해 말할 때 동원하는 논조가 있다절대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정부를 두둔하는 의견과 실제로 일어난 사실 모두에 신빙성을 부여해서 결과적으로 폭로 사실을 희석시켜서 헷갈리고, 앞뒤가 안 맞으며, 종종 사소한 기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주장에 변함없이 큰 무게를 실어주는데, 심지어 명백하게 사실이 아니거나 기만적일 때도 그렇다

(사실 팩트에 기반해서 보도하는게 전부는 아니다. 팩트를 어떻게 구성하고, 어느 측면에 무게 중심을 두는 지에 따라 기사의 가치와 방향이 확 바뀌곤 한다. 일류일수록 이런 걸 아주 교묘하게 잘한다고 본다.)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또 다른 관례적 규칙은 언론사가 그런 비밀문서를 몇 개만 발표하고 중단해버리는 행태다. 스노든이 제보한 것과 같은 문서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단발성 기사로 발표하고, “대박 특종을 냈다는 칭찬을 실컷 즐기다가 상을 타고는 손을 놓아버린다. 그래서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게 한다. 

(
이것도 너무 익숙한 행태. 이래서 정보 공개가 중요하다. 언론은 취사 선택할 수 있다. 전체의 그림에서 어느 부분을 부각시킬 것인지, 얼마나 할 것인지. 그게 미디어의 본질. 어떤 미디어가 그런 취사 선택을 가장 잘 하느냐에 따라 그 미디어를 신뢰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다만 대체로 못미더워서, 독자들에게 그런 미디어를 알아볼 눈까지 갖추라고 하는 세상이 좀 버거울 뿐이다)

미국 정부가 비밀 정보를 보도하는 행위를 범죄로 간주할 수 있으며(과연 그런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심지어 신문사라고 할지라도 간첩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이 사건을 폭로하면 오바마 정부의 과거 행태를 고려해봤을 때 스노든 뿐만 아니라 신문사도 처벌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FBI가 들이닥쳐서 사무실 문을 닫고 파일을 압수할 수도 있다고 해요자닌이 말했다.

이 대목은 가디언이 기사 게재를 망설이는 것으로 판단한 글렌의 목소리. 글렌이 보기엔 가디언도 다른 언론과 마찬가지로 좀 쫄았다 싶었을 수도. 그러나가디언은 멋지게 해냈다

글렌이 처음에 "특종이어요, NSA 일급비밀 제보자" 운운하던 첫 전화통화에서 가디언 편집장 자닌은 "지금 뭘로 연락하신거여요?... 스카이프로는 절대 안되요"라고 대답하고 다음날 영국에서 뉴욕으로 날아갔다. 두근두근 하는 순간 아닌가

 

유치한 몽상 같기도 하지만, 언론이란 거대 권력에 맞서는 것이 숙명그 정도 자세와 맷집, 대비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언론의 힘은 투명한 정보 공개에서 나온다. 스노든의 말 마따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빛" 이다.

사족을 붙이면. NYT는 베너티 페어의 칼럼니스트 Michael Kinsley  책에 대해  북리뷰를 실었는데 글렌에 대해 a self-righteous sourpuss (혼자 정의감에 불타는 음흉한 놈?) 이라 하고, 정부 비판하는 언론 역할에 한계를 지웠던 모양인데.. 독자들 반발에 결국 이에 대해 사과했단다. (여기)

A Times review ought to be a fair, accurate and well-argued consideration of the merits of a book......Mr. Kinsley’s piece didn’t meet that bar."

the worst offense may have been Kinsley's claim that journalists should not be able to reveal classified government information .... 라고.

NYT가 그래도 아주 나쁜 놈은 아닌걸까?ㅎㅎ 그래도 '정론지'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가 저런 평가를 받고 있다니 놀랍고 한심하다. 몰랐던 나도 함께 한심하다미디어가 망가지면, 시민이 피곤한데. 아무래도 시민들이 더 험난한 시대를 관통해야 할 모양이다. 미디어의 프레임은 더 자주 왜곡될 것 같고, 미디어 시민운동이 좀 더 똑똑하고 더 강력해져야 할 시점이다


다만 넘 괴로워하지는 말아야겠다. 일류 미디어들이 겁내고 있을 동안, 홀로 용감하게 모든 것을 공개해버린 '순교자'급 내부고발자 스노든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