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구원투수, 된장국

사소한 2012. 7. 9. 00:29

6월 세번째 수요일, 초여름 저녁 바람은 선선했다. 레스토랑 안마당 야외 자리에는 곳곳에 넥타이 차림 성공남들만 우글우글 했지만, 나무 그늘은 좋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저녁 한번으로 며칠치 거뜬하게 충전될 그런 자리였다. 그러나 인생 그리 간단할 리 없다. 종일 우울할 것이 확실시 되었던 터라 일부러 골라입은 화사한 원피스는 별로 도움이 안됐다. 차분하게 된장녀 코스프레를 해도 부족할 마당에 자꾸 시큰했다. 시간 맞춰 온 K는 내 표정부터 살폈다. 당초 K의 생일을 맞아 겸사겸사 모이는 자리. 코키지 무료인데다 분위기 좋은 공간을 골랐거늘 이게 오히려 문제가 됐다. 공교롭게도 내 가족에게 불운이 통보된 날인지라, K는 내 기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우아한 장소부터 걱정해줬다. 생물학적으로 훨씬 어린데다 소녀의 감성을 갖췄음에도, 어른스러워 또래 친구 같고 세심한 K. 그녀 덕분에 눈물이 더 쏟아지려 했다. 그렇다고 어디 칙칙한 골방에 숨어들어 술만 퍼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시작은 샴페인이었다. K가 즐거운 자리를 위해 일부러 H호텔에서 구입한 좋은 술. 얼음박스에 넣어 차갑게 식힌 샴페인의 맛은 청량하고 깊었다. 이게 고통의 시작일 거라 상상도 못했다. K 말 듣고 어디가서 소주라도 마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준비해온 샴페인이 떨어지자 와인을 주문했다. 하나 둘 도착해 총 5명이 모였는데, 이날 와인만 3병을 마셨단다. (주폭이 별건가) 결정타는 얼마전 스웨덴에 다녀온 K가 면세점에서 사온 보드카. 당초 그렇게 달릴 생각은 아무도 없었을텐데, 술자리란 항상 오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 샴페인에 와인을 거쳐 보드카 병을 따고 말았다. 그리고 보드카 첫 잔 이후 필름이 끊겼다. 깨끗하게 끊긴 건 나름 오랜만. 술 값 계산은 이날 청일점인 H쌤이 맡았고, K를 비롯한 미녀 동생들이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힘내라고 차례로 꼭 안아주었다고 한다. 이런 감동의 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다니, 이게 사는 건가.. 그런거지 뭐.


다음날 우리 부부는 각각 아침부터 술 냄새를 뿜어 댔다. 기적적으로 일어나 아이 등교를 챙겨주긴 했는데, 수박을 한조각 먹었더니 속이 별로 였다. 옆지기가 데려다 준다고 해서 같이 집을 나서면서 편의점에서 여명808을 사서 한 병씩 나눠마셨다. 그리고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여명808이 속에서 부글부글. 옆지기에겐 말도 못한채 간신히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얼굴이 어땠길래, 만나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걱정해줬다. 이날 오전에만 화장실에 다섯 번은 간 듯 하다. 계속 게워대다 보니 풍만한 배에 복근이 생기는 걸로 착각할 지경으로 땡기고 아팠다. 


광화문 오찬간담회는 12시였다. 20여분 택시를 타고 갔는데, 당연하게도 멀미인지 속이 안 좋았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화장실부터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여인은 팍 삭아보였는데,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나름 공식석상. 상냥하게 명함 주고 받고 가벼운 농담으로 자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호스트께서 맥주를 주문했다. 별 수 없이, "술병이 나서 안 들어가네요"라고 고백하며 살짝 웃었다. 나름 우아한 녀자, 이런 얘기 하면 오히려 다 그러려니 해준다. 아닌가? 

이날 메뉴는 한정식 풀코스. 일단 물김치를 세 숟가락 정도 떠먹었다. 잣죽이 나왔길래 두어 수저 입에 댔다. 좀 나아지는 건가? 둔한 위장은 실신 상태인지 별 신호가 없었다. 애피타이저로 잡채와 해파리 냉채, 탕평채, 샐러드 등이 나왔다. 평소엔 젓가락질 부지런 했을텐데, 간신히 탕평채를 조금 접시에 옮겨 담았다. 총 8명이 앉아 식사하는데 혼자 단식 투쟁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다른 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탕평채 청포묵 한 가닥을 두 세 토막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깨작깨작 먹는 시늉을 했다. 이어 삼합에 떡갈비, 왕새우 구이 등 현란한 코스가 나왔는데, 역시 대부분 포기. 불쌍해보였는지 옆에서 들깨탕을 떠주셔서 두 숟가락 입에 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달려가 다시 변기를 붙들었다. 반나절 변기와 이렇게 친해지다니. 


이런 컨디션에 저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니, 월급쟁이 인생 어쩔건가. 그런데 인생의 묘미는 저기 눈 앞에 보이는 모퉁이 너머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다. 한정식 풀코스는 마지막에 밥과 국이 나온다. 이날은 된장국이었다. 혹시나 해서, 조금 떴다. 된장국이 혹시 약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보약을 대하는 마음으로 된장국물을 떠먹었다. 눈물이 날 뻔 했다. 괜찮았다. 위는 얌전히 된장국물을 모셨다. 이대로 종일 죽겠구나 싶었는데, 극적인 반전을 맞이했달까. 후식으로 나온 오미자차와 포도까지 두 알 먹었는데, 속이 괜찮았다. 아니 점점  상태가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오전에는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는데, 오후에는 멀쩡하게 일 잘 했으니 이게 기적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국은 나트륨 섭취를 너무 많이 하게 만드는 것 같아 최근 집에서 잘 끓이지 않는다. 물론 귀찮기도 해서 주로 일품요리로 한가지만 요리한다. 된장국도 끓여본지 오래됐다. 앞으로도 자주 해먹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된장국 앞에서 경건하고 겸허해질 것 같다.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많지 않은 세상이지만, 최소한 궁극의 어려움에서도 어디선가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전혀 예기지 못한 모습으로. 


도다리쑥국 이후, 몇 년 만에 음식 개똥철학에 빠져들게 해준 된장국, 고맙다.


<사진은 퍼왔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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