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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선> 통치 대신 권력유지에만 매달렸던 댓가

소박한 리뷰/비소설 2014. 4. 13. 01:59

 


못난 조선

저자
문소영 지음
출판사
나남 | 2013-07-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요즘 16~18세기 조선시대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
가격비교


일본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하고 있고, SF영화에나 나올법한 무기를 개발했다고 굳게 믿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을 뿐이다
. (참고 :
일본은 전쟁에 지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들, 카치구미() ) 

뉴스가 제 역할을 못하면, 당대의 기록은 조작될 수 있구나 싶었다. 현재는 왜곡되기 쉬워도 과거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과거도 구멍이 많다. ‘역사를 제대로 못 배운 탓인지. 막연한 반일 감정이 있었던건지. <못난 조선>은 조선과 일본, 중국을 비교하며 조선의 실수를 따져보는 책이다. 광복 이후 식민사관을 씻어내고 민족적 자긍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한국 민족 최고라고 강조, 열등감을 떨쳐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는 덜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책의 목적은 분명하다. 현재와 미래를 겨냥한다. 어떻게? 살펴보자.

조선 후기, 일본은 선진국이었다
.
 
일단 일본에 대해 백제 문명을 얻어가고 조선시대에는 도공을 납치한 후진국으로 오해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몇 가지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578년 설립된 일본의 건축회사 콘고구미. 창업자는 백제에서 건너간 콘고 시게미쓰. 한반도인. 그와 그 동료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시텐노지(사천왕사) 593년 건립. 일본 문화 원조가 한반도에서? 무려 15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 기업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2, 3위도 보유. 708년 창업한 온천 여관업의 케이운칸. 718년 창업한 여관업 호시..일본에서 100년 이상 된 기업은 5만 개이고, 200년 이상 된 기업도 3146개나 된다
.”

“21
세기에도 일본은 책을 많이 읽는 민족으로 소개되지만, 17세기에도 일본은 조선인보다 더 많이 책을 읽은 것 같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얻기 위해 조선에 매달렸던 일본은 17세기 말 출판의 대중화. 에도에 약 6000명이 넘는 출판업자. 교토에는 1만 점이 넘는 서적이 출판됐다


자포니즘(Japonism)이 유럽에서 맹렬하게 대중적으로 유행한 시점은 19세기 중엽. 17세기 중엽부터 일본에서 도자기 칠기 가구 등을 수출한 것이 바탕이 됐다. 자포니즘의 본격화는 일본의 다색 목판화인 우키요에가 유럽에 진출하면서. 1856년부터 파리의 콜렉터들은 열정적으로 일본의 우키요에를 수집, 일본문화의 유행을 만들었다..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일본 여인>을 그린 모네는 물론, 로트렉,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과 <해바라기>의 고흐와 고갱 등 후기 인상파 화가, 아르누보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클림트, 현대미술 아버지 피카소,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 등도 일본의 우키요에의 영향권에 있었다.. (86~87
)”

 


열린 사회랄까. 기업가 정신을 존중하며, 새로운 걸 배우는데 열심이었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멕시코와의 무역도 희망했을 정도. 네덜란드 등 유럽은 물론, 시암(태국)제국과 인도차이나 안남, 캄보디아의 파타니 등과도 교역했다
.

정권 유지에 밀려난 조선의 국정 철학


반면 조선의 쇄국 정책이 아쉬운 것은, 국가 운영에 대한 철학이나 전략이 아니라 제 밥그릇을 지키고자 했던 지배층 정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14세기까지 고려는 국제 국가로서 흠잡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조용한 은둔의 나라가 된 배경이 무엇일까. 16세기 이전 조선에는 일본에 없던 도자기, 면화와 면직물, 인삼까지 귀한 상품을 가진 국가였는데 어디서 꼬인 걸까
.

광해군의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배척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조반정의 승리자들은 이후 명분과 의리, 착시와 자기암시로 점철됐던 조선 후기의 사대주의를 만들었다. (355
)”

조선 초기만 해도 유연했던 사회였으나 치열한 당쟁은 학문적,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 주자학 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고 다른 해석은 곧바로 이단이 됐다.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가는 것과 닮았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송시열과 노론의 정치적 기반. 당시 통치철학으로 효력을 상실, 중국은 물론 일본도 외면한 주자학에 집착했다.

흔히 계몽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택한 전략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순수한 한문의 문장체를 옹호하는 반면, 참신한 문장이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만든 문체반정. 정조는 새로운 문화적 경향을 억압하고 언로를 봉쇄하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다. 규장각 조차 문체반정을 뒷받침하는 책만 골라놓았다 한다. 박지원은 물론 당대의 실학자 정약용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

황당한 것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150년 황금기의 청나라를 거부해놓고,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명백히 쇠락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를 받아들였다는. (354~355) 세계 정세를 저렇게 못 읽을 수가.

저자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박지원, 정약용 등) 북학파의 주장은 그저 비주류의 아우성. 이런 경향은 21세기 현재도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계층에서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틀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서문에서 아쉬움을 밝힌다.  조선 초기와 달리 신분제는 굳어져, 한 번 노비는 대대로 기회가 없는 노예사회였으며 중산층 상당수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 이 와중에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 내는...것이 양반들의 특권이었다고 하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책 읽다 상당히 충격 받았던 이 부분은 번외편 별도로 짧게 정리 ^^;;)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경제적 궁핍에 내도록 시달렸으며...조선의 국력은 청화백자 조차 일종의 사치금지법으로 막을 지경이었던 그 시절. 오히려 채색 도자기 유행을 이끌며 중국과 일본이 각광 받은 사연을 비롯해 책은 조선의 문화와 경제, 사회와 정치를 찬찬히 살핀다.

책을 쓴 문소영 선배는 청와대 국회 등을 취재하는 훌륭한 정치부 기자였고, 글이 너무 매서운 탓인지(^^;;) 최근 몇 년 문화부에서 미술 등을 담당했다. 덕분에 도자기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비롯해 문화와 사회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엮어내는 솜씨가 매끄럽다. (단언컨대 최근 문 선배에게 밥 얻어먹은 적 없음을 밝혀둡니다. 책은..2010년에 받은게 사실이지만^^;;) 기자가 쓴 책은 사실 빤하거나 깊이 있거나 인데.. 인용 수준만 봐도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런 책을 몰라보고, 팽개쳐두었던 무심한 후배로서 뒤늦게 리뷰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책이 괜찮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얼마전 김탁환쌤의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읽고서 팔랑귀 답게 역사에 관심이 생겨 꺼내들었지만, 이제라도 읽어 얼마나 다행인지. 서론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국사학자들이 술자리에서는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늦어도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500년 넘게 왕조를 이어간 세계적으로 드문 왕조였다. 하지만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편안하게 살게 했느냐는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인 왕조는 아니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적으로 200~300년간 이어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국가를 일신했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제도개혁을 통해 나라를 혁신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이 500여 년 지속되자 혁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닐까?"

'못난 조선'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곱씹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조선의 지배층이 저질렀던 실수를 찬찬히 살펴보면, 오늘날 정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을 유지하려던 사대부들이 '딴 말' 못하게 금지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이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란게 다를 뿐인데...
21세기 한국은 사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잘 사는 나라다. 하지만 기회가 어떻게 열릴지, 촉을 세워야 마땅하다. 결론 부분에서 몇 구절 더 인용한다.

"친북 종북 낙인찍는... 그러나 묻고 싶다. 북한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로 안되나? 사회주의 종주국 중국, 과거 식민지배로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하고도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내세워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판인데."

아니 이 분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ㅠ 살짝 얼었다가...그런데 또 안될건 뭐지? "통일 없이 남한만으로 21세기를 무사히 통과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에 어쩐지 끄덕.

'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1인당 국민소득 어쩌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배타적 민족주의나 안하무인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변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노력과 개방성, 포용성, 다양성 등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정부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간단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속 역사를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못난조선_메모.docx


부록>> 메모.

부록 2>> 저자와의 메신저 대화. 

선배. 조선은 역시 못났었고.. 그러니 근대화는 일제가 기여한거지.. .뭐 이런 식의 전개에 대해 대개 뭐라고 하시나요.. 일제가 미쳤냐?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게??? 극단적인 사례! 창녀를 아름답게 치장시키는 것이 투자냐? 수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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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른생각 2014.08.19 18:59 Modify/Delete Reply

    1) 조선 초기만 해도 유연했던 사회였으나 치열한 당쟁은 학문적,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
    주자학 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고 다른 해석은 곧바로 이단이 됐다.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가는 것과 닮았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송시열과 노론의 정치적 기반. 당시 통치철학으로 효력을 상실, 중국은 물론 일본도 외면한 주자학에 집착했다.


    조선시대 주자학이 그렇게 문제가 되었다면 왜 청과 에도 막부는 관학으로 주자학을 체택했을까요..?

    성리학(주자학)이 많은 폐단을 안고 있음에도 왜 성리학을 대체하는 학문이 안나왔을까요?


    성리학도 종류가 있습니다.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갈리는데 청은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갈아탔는데 조선은 주자학을 계~~속 붙들고 있었고요. 특정 시기가 되면 뭔가 바뀌어야 되는데 안바뀌고 쭉 간겁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죠?? 일본은 성리학보다는 주로 국학을 더 숭상하는 분위기였고요. 조선이나 중국처럼 성리학 덕후가 아니었어요.


    이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사실...


    성리학이 곧 주자학이고 양명학은 주자학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태동했습니다. 그리고 청,일본도 말했지만 주자학만이 원칙이고 관학이었지, 국학은 어디까지나 소수 학자들의 전유물(차지한 위상이 딱 조선의 강화학파쯤 될껍니다..)이었지. 일본의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양명학의 최대 문제는 '정답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 결론적으로 아무 결론도 도출하지 못하게됩니다. 이런 문제점탓에 양명학은 왕양명 사후로 뚜렷한 걸물을 배출하지못하고 그저 기초적인 상태로 자리잡아 이론적인 면에서 성리학을 뛰어넘지 못하고 도태되고 말았습니다. 괜히 성리학이 동아시아를 지배한게 아닙니다.


    결국 성리학을 대체한다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었습니다.


    명말에야 유행했지, 그 양명학이란 게 당시 에도 막부조차 깠던 학문인게 현실이니.........
    무슨 사상이 관학이 되려면 어떠한 문제에 대해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 양명학은 그게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죠.. 정답은 없다니.. 모순된 사회 현실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었던 것이죠.



    2) 조선 초기와 달리 신분제는 굳어져, 한 번 노비는 대대로 기회가 없는 노예사회였으며 중산층 상당수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 이 와중에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 내는...것이 양반들의 특권이었다고 하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조선 초기와 달리 신분제는 굳어져



    이것 또한 흔한 오해들중 하나죠..


    “조선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였다. 500년간 유지된 과거제도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오늘날 한국의 강한 교육열이라는 문화적 유전인자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과거제도라 할 수 있다.”

    조선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75)가 양반뿐 아니라 평민과 서얼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대거 과거에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출간했다. 조선이 신분 이동에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회였다는 학계의 기존 통념을 뒤집는 주장이다.


    심지어 최신 연구자료를 보면 천민의 신분으로 관직에 오른 사례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들 가운데 신분이 낮은 급제자들의 비율


    http://blog.naver.com/marich77/40201245403



    노예사회였으며


    사실이 아니죠..

    그리스ㆍ로마사의 권위자인 핀리는 그리스ㆍ로마의 역사적 경험에서부터 노예제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1. 노동력의 恒久的 공급이 필요할 만큼 대규모 단위로 집중된 사적 소유재산
    2. 상품생산과 시장의 발달
    3. 내부로부터 다른 대가(?)의 노동이 공급될 가능성의 부재

    라는 세가지를 달았다. (중략)


    그렇지만 노예제 사회? 라는 7-19세기 한국은 핀리의 조건들을 단 하나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노예제사회>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매우 상이한 유형의 두 문명사회가 만나는 시대나 지역에서 성립했다는 것인데.. (중략)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도 크게 말해 지중해를 무대로 한 다른 문명의 충돌에서 성립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1-19세기 한반도의 국가들은 그러한 국제적 환경과 전혀 무관한 곳에 위치하였죠.)



    중산층 상당수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


    중산층 상당수가 노비로 전락했다고 하지만 조선 전체 인구에서 노비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10% 미만..


    일단 성종시기 인구를 1100~1200만으로 잡고 노비의 비율을 정확히 35%로 잡고 (이시기부터 도망노비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공노비 30~35만을 제외하면 대략 385~420만명이 되는군요.


    그렇다면 사노비는 350~390만명 정도 됩니다. 여기서 외거노비와 솔거노비의 비율을 7대 3로 잡으면 약 245~273만명이 됩니다. 조선시대 실제 인구의 22% 정도 차지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있습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조선의 노비제를 고대 그리스ㆍ로마나 근세 러시아와 비교하는게 말이 안되지요. 왜냐하면 이들은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상전에게 내는 세금을 내는것을 제외하면 딱히 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조선 법률도 이들에게 딱히 엄격한것은 아니라 도망노비의 처벌을 상전에게 일임했고(대신 처벌을 하지 않은셈. 그러나 그들도 노동력을 상실할 정도로 두들겨패지는 않았다.) 도망간 기간이 아무리 길다해도 최대 3년만의 신공만을 거둘수 있게 했습니다. (단 하나 재산을 상속할떄 상전이 개입해서 재산의 일부를 가져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불법이었다.)


    즉 타국의 노예제와 비슷한 개념의 노비 수는 고작해야 사노비의 30%인 106~117만명정도인데 이들은 실제 인구의 10% 미만 정도였습니다. (동시대 일본 인구의 80%가 농노였던 것과 비교를 해보면..)


    추가 자료

    일본의 농노제 1

    http://blog.naver.com/marich77/40142688132



    이 와중에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 내는...것이 양반들의 특권이었다고 하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이것 또한 잘못된 오해인데.. 양반에게 군포는 면제되지만 토지세는 꼬박꼬박 징수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노비들도 양반들 처럼 군역과 세금이 면제 되었습니다.

    참고로 실질적으로 조선시대에 노비는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국가의 입장에서는 노비를 줄이고 양인을 증가시키는것이 이득이었습니다.

    (다만 공노비 중 토지를 소유한 일부는 어느 정도 납세의 의무를 지긴 했습니다.)

    또한 조선시기에는 납세와 군역을 피하기위한 양인계층의 자발적인 예속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를 협호(挾戶)라고 합니다. 협호란 국가의 역이 부과된 양인들이 역을 피하기위해 자발적으로 지역 유력자들에게 노비처럼 예속되서 호구조사를 피한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각 군현의 유력자들 밑으로 스스로 예속되는대신 유력자들이 호구를 축소보고해서 역을 피하게해주면 유력자들밑에 소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세금 내고 군대가기 싫어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노비가 된 경우...)




    3)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경제적 궁핍에 내도록 시달렸으며...


    하지만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편안하게 살게 했느냐는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인 왕조는 아니었다.



    조선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백성들이 엄청나게 가난하고 궁핍에 시달린게 사실이었지만..

    동시대 국가들과 비교하면 가장 백성들의 세율이 낮고 그나마 살기 좋은 나라였던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최근 연구 자료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일본과 조선을 한 번 비교해보면..



    조선시대의 세율은 실제 20~23%정도였고 에도시대 일본의 세율은 무려 40~50%였습니다. ㅎㄷㄷ (부과세나 수송세 합치면 또 여기서 10~20% 증가됨) 그리고 일본 또한 강제노역이 정규 세금입니다..

    일본인들은 그냥 심심하면 끌려나와서는.. (거기에 조선 통신사나 류큐 사은사가 지나가면 또 동원되고..) 그런데 조선은 일이 없으면 동원이 없었죠. 물론 일본이 조선보다 생산량 자체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에도막부의 가혹한 수탈로 인해서 (세율이 이것 저것 다 합치면 무려 70% ㅎㄷㄷ.. 거기에 강제노역까지 추가되면..) 실제 대다수 일본 농노들의 삶은 빈곤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흔히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부유했다고 착각하는데 그건 교토,오사카,에도같은 대도시의 일부 사무라이 계급 이상에게만 한정되는 일이고 나머지 일본 농노들은 조선의 노비들 보다도 오히려 더 가난하게 살았죠..


    심지어 일본 농노들에게는 무명으로 만든 옷은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착용이 금지되고

    하의마저 착용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 농노들의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보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http://www.kjclub.com/kr/exchange/photo/read.php?tname=exc_board_14&uid=4400&fid=4400&thread=1000000&idx=1&page=1&number=2&f=a.k_subject&word=%ED%9B%88%EB%8F%84%EC%8B%9C


    예를 들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분열된 일본을 안정시킨 영웅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추구한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가문의 권력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百姓は死なぬように、生きぬやうに、合点致し収納申付"

    "백성은 죽지 않을 정도 살지도 않은 상태의 합치점을 찾아서 세금을 걷어라" 라는 유훈을 남겼죠..



    실제로 에도시대의 농노들에 대한 수탈은 조선의 노비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은 참깨처럼 짜면짤수록 기름이 나온다]라는 것이 당시 에도막부의 사고방식이었죠..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백성들을 가차없이 쥐어짰기 때문에 막부의 재정은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족했고

    이렇게 백성을 수탈하여 얻어진 튼튼한 재정이 메이지 유신 과정에 종자돈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거기다 일본의 신분제는 조선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었고, 거주의 자유 조차도 전혀 없었죠..
    그래서, 에도시대 농민들을 사실상 전부 농노라고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사무라이들에게는 농노들을 살해할 권리가 있었으며, 실제로 칼을 맞기 일쑤였죠.
    조선에서는 십시일반이라는 말이라도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십시일반도 공멸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를 솎아내기라고 부릅니다.
    이는 에도시대 인구 정체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주로 여자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에도시대의 남녀비율은 매우 기형적인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별다른 통치철학도 없이 강자들이 칼로 위협하여 약자들을 가차없이 수탈하던 사회, 그곳이 바로 메이지유신 이전의 일본이었습니다. 조선보다도 더 가혹한 노예제 국가가 바로 에도시대 일본이었죠..



    에도시대 - 인구의 인위적 조절


    http://blog.naver.com/marich77/40202208821



    에도시대-솎아냄과 목각인형


    http://blog.naver.com/marich77/40202642935





    가장 기초적으로 정부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공감은 합니다.. 하지만 가장 신분 이동이 자유롭고 언론의 자유가 동시대 동양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조선이 오히려 백성들을 가차 없이 착취하고 언론과 신분 이동을 철저히 틀어막은 일본에게 역으로 먹혀버렸다는 것은 굉장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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