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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표절의 이해>이준웅 선생님의 글에서 길을 찾다

주변에서 공부 좀 더 하라는 조언이 이어졌고, 얼결에 주경야독에 나섰다. 스물셋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가방끈은 짧지만, 경험은 많다고 우겨왔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런데 석사논문을 쓰란다. 당초 입학할 때는 학술 등재지에 투고만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학칙이 바뀌었다. 두둥. 이것은 날벼락.

요즘 분위기에 논문 쓰다 패가망신할 일 있나? 그냥 대학원 수료만 할까? 짧은 고민 끝에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안되면 관두면 되지, 부담갖지 말자 스스로 세뇌중이다.

그리하여 논문 준비하는 나의 첫 '의식'이 바로 이 감상문이다.

서울대에서 미디어를 가르치는 이준웅 선생님의 '표절의 이해'라는 글을 꼭 찬찬히 읽어보고 싶었다. 가끔 공부하는 자리에서 뵙는 이쌤. 말씀은 어찌나 조리있고 통통 튀는지. (심지어 이쌤은 매우 귀여우시다. 세상 불공평하지ㅋㅋ) 미디어 쪽에서도 워낙 훌륭하시지만... 특히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난 뒤 통찰력 있는 분석과 정리가 일품이시다. 또한 K님이 매번 감탄하듯, 특히 이쌤의 <말과 권력>에 대해 거품 물고 감탄하듯, '구어'와 '문어'가 거의 일치하는 희한한 선생님이다. 말하는 듯 흘러가는 글이라니. 당연하게도, 이 글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고 넘친다.

링크로 보시거나 http://plaza.snu.ac.kr/~jwrhee/paper/plagiarism2013-1.pdf


파일로 받아보시거나

표절의이해_이준웅.pdf


"놀랍게도 표절 개념을 미리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에 따라 표절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제시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표절이라 불리는 행위의 윤리적 중요성과 행위의 광범위에 비하여, 그 개념 규정과 적용 여부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빈약하다. 나는 이런 현실 역시 표절에 대한 몇 가지 근본적 오해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어쩌다가 표절에 대한 정리를 시작했을까. 표절에 대한 오해를 줄이고, 무엇이 표절인지 정의하는 것은 사실 요즘 그 중요성을 더한다. 이쌤은 2009년 이후 매 학기 서울대 연구윤리 특강에서 <표절과 의사소통 윤리 : 진정성, 본원성, 그리고 타인의 이익 침해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발표하고, 이 글을 수정하고 계신 모양이다.

그 강의를 들어보지 못한게 아쉽지만, 이 글을 통해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생각의 복제' 문제.

표절 문제에서 "다른 저자의 현재적이거나 잠재적인 이익을 침해"하느냐의 문제는 중요하다. 윤리적 요구인 동시에 법적 책임을 동반하는데, 바로 저작권이다. 다만 저작권은 창작물에 표현된 '생각 그 자체'의 복제를 금하지는 않는데, 표절은 조금 다르다. 이쌤은 "표절과 관련된 가장 흔한 오해는 다른 저작의 표현을 복제하면 표절이지만, 해당 표현을 풀어쓰기(paraphrasing) 혹은 표현만 바꿔서 옮기는 것은 표절이 아니라는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표현의 단순 복제가 아니더라도 독자가 기대하는 저작물의 고유성에 대한 기대가 배반될 경우 표절이란 거다.

솔직히 Copy & Paste 는 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쓰면 되겠지, 생각했던 나로서는 어쩐지 나쁜 생각을 들킨 기분. 이쌤은 "표절은 주로 예상된 독자의 저자에 대한 기대를 배반하는 문제"라 지적한다. "다른 누구의 생각이 아닌 바로 그 저자 자신의 생각을 반영할 것이라는 기대, 저자의 독창성에 대한 기대"를 어찌할 것인가. 설혹 어떤 학생이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자신의 보고서를 슬쩍 활용해 논문을 쓰신 것에 대해 피해를 소명하기는 커녕 영광이라 생각하더라도.. 표절의 요점은 저자와 원저자의 관계가 아니라 저자와 독자와의 관계라는 거다.

'자기표절'이라고 요즘 신문에 흔히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도 이쌤의 정리는 명쾌하다.

그는 "모든 저자의 저술행위는 항상 고유해야 한다"는 전제에 대해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독창성은 분명 칭찬받아야 할 미덕이지만, 모든 저자가 '항상' 실현할 수 있는 미덕은 아니기 때문"이란 건데, 사실 예전에 썼던 자신의 글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100% 불일치 하는 새로운 글이 가능할 리가. 이쌤은 '자기표절'이라는 개념 대신 '이중 게재' 또는 '무리한 활용' 개념으로 대체하고, 학술공동체에서 윤리적 규제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쌤 평소 스타일처럼 분명하고 심플한 이 글은 "표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도 제시한다. 우선, '정당한 인용'이 기본. "표절을 미워해서 모든 모방을 적대시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 두번째는 '본원성(authenticity)의 역설'이다. 이샘은 Taylor(1991)를 인용, "자신의 본성, 배경,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 충실함을 의미한다"고 본원성을 설명한다. 그래서 본원적 글쓰기란 "자신의 본성의 모든 강점과 약점, 그리고 출신과 배경의 좋음과 나쁨을 드러내고, 반성하며, 극복하는 글쓰기"라고... (아, 이런게 글쓰기였다!)

"표절은 비본원적 글쓰기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포장하고 싶은 저자, 모르면서 아는 체 하고 싶은 저자, 그리고 그저 자기 자신의 현재 상태가 부끄러운 저자가 표절 작가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나도 이쯤에서는 단언하고 싶은데, 내 능력을 포장하고 싶지 않을 리 없고,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을 리 없지만.. 종종 부끄럽지만, 이제 이런 함정을 알았으니 경계하리라. 본원적 글쓰기에서 멀어지는 일을.

표절에 대한 이 글을 읽어보면, 언론사에 계신 분들께도 꼭 전하고 싶다. 표절에 대한 판정은 반드시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해당 분야의 일반적 지식이 무엇인지, 고유한 학술적 가치의 창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들만 가능한게 표절이다. 단순히 기계를 돌려 판정할 일이 아니다.

또한, 표절이 감옥 갈 범죄인가? 낙마할 꺼리는 되는 건가? 대체 표절에 대한 '단죄'는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이 쌤 글의 마지막 대목을 빌린다. 

"혹자는 표절을 범한 대가로 단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나 '오명을 갖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보다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간주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표절을 통해 '학위'를 악세사리로 장착하고, 그런 '위치'와 '경력'을 내세워 '공직'을 탐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바람직하고. 스스로 그런 용감한 결단을 내릴 위인이 못되는 경우, 여론이 '나쁜 사람'이라며 공직에서 물러나라고 비판하는 것이 온당치 않을까 한다. 마녀사냥은 언제나 조심스러워 마땅하지만, 공직자에게는 더 엄격해야 하는게 '국민의 도리, 납세자의 도리'다. 공직자가 아니라면? 그건 그 동네에서 해결할 문제일 뿐.

이제, 논문을 본격 준비해볼까 한다.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