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해’에 오래 걸렸다. 얇은 두께를 만만하게 봤나보다. 부제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유혹적 제목과 별개로 알고보면 부르디외 해설서. 알고보니 매력적 지식인. 언어와 취향이 사고를 어찌 바꾸고,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실마리를 제시한다.
나는 콘텐츠 중독자. 책과 영화 등을 평균 이상 즐긴다. 스스로 ‘지적 허영의 여왕’이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사람이 명품이니 명품이 필요 없다고 곧잘 떠벌렸다. 이 또한 내가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을 어느 정도 갖췄음을 드러내는 오만함이요, 내가 가질 수 없는 부르주아 취향을 ‘여우의 신포도’ 쯤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략이었던 것을 이제야 해석할 수 있다.
“사진찍기, 박물관, 전람회 가기..따위의 일정한 취향이 사회 계급을 유지시키며,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급적 정체 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제”. “주말에 뭘할지 문화적 선택이 개인적이고 우연해보여도 계급적으로 길들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사소한 일상 따위는 없구나. 먹물의 자만심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나보다. 이런 취향은 예술이나 문화에 머물지 않고 음식소비, 가구취향, 패션감각 등도 포함한다는 대목에서 움찔했다. 나름 트위터 먹방계에서 활동하며 맛집을 섭렵하고자 했던 것 조차 상대적으로 가진 자의 취향이었나.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지배가 강화되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이 억압된다는 해석에 당황했다.
지적 허영, 혹은 허세로 취향을 포장해온 나라는 인간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책의 일부 성과. 부르디외는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사변적 경향을 타파하고, 보다 실증적 연구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학자의 임무”이며 “학문의 목표가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런 해설서가 필요할 만큼 어려운 학자인 동시에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지식인의 표표함이란!
(부르디외 옵바 사진을 찾다가 트윗 계정을 찾았다! 프로필 사진 뽀스 좀 보소. French Sociologist 라는 간단한 자기 소개에 괜히 반한다. https://twitter.com/bourdieu )
특히 그는 노동자가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현상에 대해 여러가지 통찰력 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의 정치적 투표권의 행사가 왜곡된다는 주장이 그렇다. 언젠가 성공회대 김동춘 선생님 말씀 중에 실질문맹률을 심각하게 우려했던 것이 떠올랐다. 뜨거운 교육열에 대학진학률은 높지만 최소한 신문 기사 수준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이 OECD 최하위. 실질문맹률이 높다는 것은 정치집단과 언론이 ‘오염된’ 언어를 통해 상황을 왜곡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정치집단에 책임을 묻는데도 지식이 필요하고 정보를 이해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게다.
예컨대 저자는 언론이 통계의 다양한 편차를 오차 범위란 기술적 용어로 처리할 뿐, 실제 그 여론조사가 어떠한 변수를 근거로 조작되었는지 침묵하는 경우를 언급한다. 여론조사 결과 자체가 사실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국민 생각을 마구잡이 조작할 개연성도 있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자체가 권력이 된다. 정보비대칭 문제다.
책에서 인용하는 연구 결과, 가장 박탈당한 계급인 농업종사자가 사회적 박탈이나 경제적 불평등을 인식하는 수준은 가장 낮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쉽게 인식한단다. 이는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신의 언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웅변한다”는게 부르디외의 핵심 논리다. 조사를 해보면, 이른바 민중계급 남성들이 오히려 남성성에 매달리고 여성이 바지 입는걸 싫어하고 순결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지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흔한 동시에 정교한 함정. ‘지배의 효과’는 취향에 각인된다. 사람들의 미학적 취향은 학교나 가정에서 익힌 훈련에 따라 다르게 길들여지고 그런 취향 자체가 사회적으로 옳고 그른 잣대에 걸린다. 반면 “경제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통해 부르주아들은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물려주고”, “교육이 일반화됨으로써 학력 자격이 인플레이션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학력 자격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한다. 양방향 트랩이랄까. 경제자본과 학력자본을 가진 이들이 영리하게 달려가는 동안 지배의 효과에 세뇌되고 포획된 이들은 늘 부족한 자기 탓을 하는 덫에 걸려 지배층에 유리한 선택에 대해 가짜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정도면 200쪽 남짓 이 작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다 얻은 듯. 쉽지 않은 대목은 원래 휘릭 넘겨버리고 알아듣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종으로 횡으로 부르디외를 해설하는 저자의 공력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외교를 공부하고 정치학을 공부한 분. 사회학자 부르디외를 읽어내는 정치학자로서 말미에 우리 학계의 병폐 세 가지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트윗으로 정리한 세 가지 병폐를 옮겨놓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제법 있을 듯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못 고친다면 학계는 이미 자정기능을 잃었다고 보는게 맞을게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불행이고, 치러야할 비용일게다.
우리 학계 병폐 중 하나는 기능주의. 지식도 경제와 권력에 쓸모 있어야 한다는 풍조. 연구비 얻어내는 것이 학문의 가치와 밀접해지고..여기에 자기성찰적 지식, 옳음/그름 가늠하는 지식, 역사적 안목을 배경으로 하는 지식은 설 자리가 없다
병폐 하나는 교조주의. 분과학문 벽이 높아지면서 학자들의 집단적 무의식이 인맥 집단. '패거리'를 이뤄 교수초빙, 논문심사, 연구비 따내는 일에 집단 권력을 행사. 이 모든게 학문의 보편성으로 위장되어 있어 학계 권력 집단은 언제나 당당
학계 병폐 하나는 식민성. 이제 미국의 학위가 교수 사회나 연구집단으로 진입하는 최고의 상징자본.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의 국가나 국내 박사학위 가치가 폄하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학문의 깊이와 무게를 미국의 학위가 보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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