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파커 J. 파머는 여러가지 통찰력을 보여준다. 마침, 간만에 아빠와 대화를 잠시 나누는데, 최근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미디어 탓을 하시길래.. 꼭 그렇지는 않다고 반박했던 날이다. 미디어가 곡학아세 혹세무민 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 탓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서는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다들 아는 얘기고, 여러차례 문제의식을 가졌던 내용이지만, 다시 정리하기 위해 파머에게서 빌린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244~245쪽 내용이다.
파머는 이런 상황에 국민에게 일부 책임을 묻는다. 미디어가 팔고 있는 시장을 결국 우리가 만든 탓이다. 무지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라는데 우리는 그 어떤 뉴스보다 비와 김태희의 열애설에 더 흥분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니던가. 파머 지적대로 "우리는 민주주의의 건강에 해로운 독극물질이 담긴 상품을 구매하는 이상적인 고객"이다.
스스로 탐구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실체를 살펴보려는 충실함이 필요하다는데.. 물론, 쉽지 않지만, 다른 대안이 있을까? 대안언론은 과연 답일까? (..그건 담에..)
우리가 정치 세계를 규정하는 배타적 권리를 미디어에게 부여할 때, 우리에게 결국 남는 것은 왜곡된 현실 감각과 망가진 마음의 습관이다. 그렇게 되는 방식은 아래와 같다.
미디어가 세상의 문제를 너무 빠르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짓눌려 영향력을 발휘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뉴스가 정보를 다루는 속도와 규모는 시민에게 행동할 힘을 실어주는 대신, 정보의 과부하와 사생활로의 퇴각을 유도한다.
대부분의 미디어가 복잡한 사건과 쟁점들을 묘사할 때 고도로 선별된 이미지와 사운드 비트를 사용한다. 그 결과 현실 이해에 필요한 확장된 탐구가 좀처럼 이뤄지지 못한다.
미디어는 최근의 부정행위, 스캔들, 비극 등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잘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고, 바로 그것을 판매한다. 그 결과 우리는 어둠과 빛이 뒤섞여 있는 세계에 대해 불균형한 그림을 갖게 된다.
미디어는 우리의 짧은 주의력에 영합하고, 그것을 악화시킨다. 지난주의 뜨거운 이야기는 – 거기에 직접 연루된 사람들에게는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계속 중요할 수도 있는데 – 이번 주의 큰 사건 소식을 통해 의식에서 지워진다.
미디어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원인을 제대로 파헤치지 않고, 파헤친다 해도 가끔 엉뚱한 것에 탓을 돌린다. 우리는 고통에 흠뻑 젖어 둔감해지거나 압도적인 감정으로부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통과해 고통을 근원에서부터 천착하려 하면 미디어는 잘못된 곳으로 안내하는 경향이 있다.
영상 미디어는 전쟁터, 범죄에 멍든 지역, 또는 정치 집회 등을 보여주면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가서 모든 것을 봤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미디어가 세상을 보는 유일한 눈이 된다면 우리가 자기의 눈으로 본 것이 전적으로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기가 어렵다.
미디어의 큰 지분을 갖고 있는 몇몇 거대 기업은 좋은 저널리즘보다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의제를 앞세울 때가 많다. 그래서 일부 언론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기보다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장사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도하도록 몰아간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244~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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