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Corpus Delicti : Ein Prozess 이미지 검색하여 찾은 컷. 음반 혹은 밴드 사진만 많이 나오던데, 저자 율리 체가 록밴드 Slut과 공동으로 일부 글은 새로 쓰고 일곱 곡을 새로 작곡, 청취극과 음악이 혼합된 '음반소설(Schallnovelle)'로도 낸 덕분인듯. 이 사진은 아마도 원작을 토대로 한 연극의 한 장면으로 보인다. 독일어라 추정만ㅎㅎ)
나는 인간들로 구성되었으면서도 인간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위에 세워진 사회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정신을 육체에 팔아 넘긴 문명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내 살과 피가 아니라 정상육체라는 집단적 환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몸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스스로를 건강이라 정의하는 정상성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문제가 무엇인가는 말하지도 않은 채 자신이 궁극적 답이라고 하는 안전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종결되었다고 규정하는 철학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선과 악의 역설과 정면 대결하기에는 너무 게을러서 ‘잘 작동한다’ 혹은 ‘작동하지 않는다’에 집착하는 도덕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시민들을 완벽히 통제한 덕에 성공을 맛보는 법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구석구석 조사하는 일이 뭔가 감출 게 있는 사람에게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민중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인간의 말보다 인간의 DNA를 믿는 방법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오직 위험 없는 삶에 대한 약속에 의지해 인기를 모으는 정치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무엇이 내게 좋은지 나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국가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185~186쪽)
이 구절을 기록해두기 위해 짧은 감상을 남긴다. 주인공 미아 홀의 선언이다. 그녀의 이 말을 대중에게 전달한 언론인 크라머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 완벽한 건강사회를 유지하는 체제의 신봉자. 책은 21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 건강이 최우선 가치인 건강지상주의 사회에서 그 체제에 반기를 든 여자 미아의 이야기를 다룬다. 동생 모리츠를 잃은 뒤 슬픔에 빠져 운동과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법정에 소환된 미아의 ‘어떤 소송’.
질병이 과거의 유물이 되어 모두가 고통 따위는 모르는 건강한 사회. 감기 따위는 20년 전에 멸종된 상태다. 건강은 ‘완전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재 상태이며 단순히 질병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몸에 삽입되어 있는 칩이 건강상태를 실시간 체제에 보고, 인간은 늘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그 유토피아적 미래는 역설적으로 상상 그 이상 디스토피아적이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끼며 믿었던 체제의 헛점이 미아를 통해 드러났을 때, 체제는 어떻게 작동할까.
크라머는 “바이러스는 스스로를 위해 불결과 위험을 이용할 줄 알며 개인도 사회를 공격한다. 오늘날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핵산이 아니라 위험한 생각으로 이루어진다”고 이후 대중 선동에 나선다. 미아 홀이란 이름이 16세기 마녀라는 이유로 고문받고 탄압받았던 마리아 홀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완벽한 감시가 가능한 미래사회에서는 체제가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체제가 위험 분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인류 역사가 기록된 이래, 별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도 든다.
원래 희곡으로 쓰였다는데 대사가 아주 현란하다.
“권력이란 때때로 자기 힘을 증명해 줄 본보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특히 내부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는 더 그렇지. 아웃사이더들은 여기 안성맞춤이야. 자기들이 원하는게 뭔지를 모르거든. 굴러떨어진 과일이지.”(145쪽)
“크라머 1은 빛나는 선동가예요. 하지만 크라머2는 사실은 이 체제나 저 체제나 마찬가지라 믿죠. 맨 먼저 우리는 체제를 기독교라 불렀어요. 그 다음엔 민주주의라 불렀죠. 오늘날엔 ‘방법’이라 부르고요.. 체제는 항상 절대 진리고, 항상 순전히 좋기만 한 것이고, 항상 온 세계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강박적 욕구죠. 모두가 종교예요. 무엇 때문에 당신 같은 무신론자가 항상 똑 같은 오류의 한 변종을 적극 지지해야 하죠?”(181쪽)
동생의 죽음 이후 혼란에 빠져버린 미아는 어느새 경계인, 어느새 마녀, 어느새 테러리스트 수준이다. 경계 너머의 자유? 미아는 담배 한 가치 태웠다가 고발되어 소득 20일치 벌금형을 부과받는데 그녀의 법정 진술이다. “모리츠가 말했어요…담배를 피우는 것은 시간 여행 같다고. 자기를 다른 공간으로 옮겨 준다고.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공간으로요.”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이란 책으로 언어의 지적 유희, 실체와 사실의 관계 등을 추리소설의 탈을 쓰고 보여줬던 율리 체의 책이라 골랐다. 역시나 이 언니는 간단한 분이 아닌 바, 책은 상당히 현학적이고 그게 읽어나가는데 때로 장벽이다. 내가 읽은 유일한 전작 형사 실프가 그러했듯 중간 중간 상당히 난해하다. 그러나 묘한 매력이 있으니 또 집어들지 않았겠나. 법학박사이자 변호사인 저자는 참여적 지식인으로 유엔에 근무하며 2001년 첫 소설로 문학계 신예로 떠올랐다고 한다. (짜증나게도 저자 만 27살 때 촉망받는 소설가로 첫 발. 법학은 언제 공부한거냐. 심지어 미녀다..ㅎㅎㅎ)
당차게도 이 책이 SF로 분류되어 문학상 후보로 오른걸 또 거부했다는 율리 체의 어느 인터뷰 한 대목도 함께 옮겨놓는다. 소설이 배경인 미래보다는 우리가 사는 현재에 대한 진단이란 이유다. 우리가 가장 믿는 체제, 가장 훌륭한 체제에 경고하는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이미 일갈했다. 믿음이 흔들릴 때, 경계에 서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를 마녀로 처단해온 역사는 21세기 미래사회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소설 마지막 반전은 상당히 인상적인데, 솔직히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무시무시했다.
우리에게는 수십 년 전부터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고 이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감도 있다. 우리가 최선의 국가 형태라 여기는 이 체제가 어쩌면 다시 전체주의나 독재 체제로 급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90% 이상의 사람들이 비현실적으로 여긴다. 바로 이것이 나를 불안케 한다. ‘아 잘 굴러가고 있는데 엇나갈리가 없아’하고 생각할수록 엇나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나는 잠들지 않는 비판적 의식이 민주주의의 토대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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