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하고 있고, SF영화에나 나올법한 무기를 개발했다고 굳게 믿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을 뿐이다. (참고 : 일본은 전쟁에 지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들, 카치구미(勝ち組) )
뉴스가 제 역할을 못하면, 당대의 기록은 조작될 수 있구나 싶었다. ‘현재’는 왜곡되기 쉬워도 ‘과거’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과거’도 구멍이 많다. ‘역사’를 제대로 못 배운 탓인지. 막연한 반일 감정이 있었던건지. <못난 조선>은 조선과 일본, 중국을 비교하며 조선의 ‘실수’를 따져보는 책이다. 즉 “광복 이후 식민사관을 씻어내고 민족적 자긍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한국 민족 최고’라고 강조, 열등감을 떨쳐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는 덜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책의 목적은 분명하다. 현재와 미래를 겨냥한다. 어떻게? 살펴보자.
조선 후기, 일본은 선진국이었다.
일단 일본에 대해 백제 문명을 얻어가고 조선시대에는 도공을 납치한 ‘후진국’으로 오해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몇 가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578년 설립된 일본의 건축회사 콘고구미. 창업자는 백제에서 건너간 콘고 시게미쓰. 한반도인. 그와 그 동료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시텐노지(사천왕사)를 593년 건립. 일본 문화 원조가 한반도에서? 무려 15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 기업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2, 3위도 보유. 708년 창업한 온천 여관업의 케이운칸. 718년 창업한 여관업 호시..일본에서 100년 이상 된 기업은 5만 개이고, 200년 이상 된 기업도 3146개나 된다.”
“21세기에도 일본은 책을 많이 읽는 민족으로 소개되지만, 17세기에도 일본은 조선인보다 더 많이 책을 읽은 것 같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얻기 위해 조선에 매달렸던 일본은 17세기 말 출판의 대중화. 에도에 약 6000명이 넘는 출판업자. 교토에는 1만 점이 넘는 서적이 출판됐다”
“자포니즘(Japonism)이 유럽에서 맹렬하게 대중적으로 유행한 시점은 19세기 중엽. 17세기 중엽부터 일본에서 도자기 칠기 가구 등을 수출한 것이 바탕이 됐다. 자포니즘의 본격화는 일본의 다색 목판화인 우키요에가 유럽에 진출하면서. 1856년부터 파리의 콜렉터들은 열정적으로 일본의 우키요에를 수집, 일본문화의 유행을 만들었다..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일본 여인>을 그린 모네는 물론, 로트렉,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과 <해바라기>의 고흐와 고갱 등 후기 인상파 화가, 아르누보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클림트, 현대미술 아버지 피카소,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 등도 일본의 우키요에의 영향권에 있었다.. (86~87쪽)”
열린 사회랄까. 기업가 정신을 존중하며, 새로운 걸 배우는데 열심이었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멕시코와의 무역도 희망했을 정도. 네덜란드 등 유럽은 물론, 시암(태국)제국과 인도차이나 안남, 캄보디아의 파타니 등과도 교역했다.
정권 유지에 밀려난 조선의 국정 철학
반면 조선의 쇄국 정책이 아쉬운 것은, 국가 운영에 대한 철학이나 전략이 아니라 제 밥그릇을 지키고자 했던 지배층 정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14세기까지 고려는 국제 국가로서 흠잡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조용한 은둔의 나라’가 된 배경이 무엇일까. 16세기 이전 조선에는 일본에 없던 도자기, 면화와 면직물, 인삼까지 귀한 상품을 가진 국가였는데 어디서 꼬인 걸까.
“광해군의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배척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조반정의 승리자들은 이후 명분과 의리, 착시와 자기암시로 점철됐던 조선 후기의 사대주의를 만들었다. (355쪽)”
조선 초기만 해도 유연했던 사회였으나 치열한 당쟁은 학문적,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 주자학 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고 다른 해석은 곧바로 이단이 됐다.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가는 것과 닮았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송시열과 노론의 정치적 기반. 당시 통치철학으로 효력을 상실, 중국은 물론 일본도 외면한 주자학에 집착했다.
흔히 계몽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택한 전략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순수한 한문의 문장체를 옹호하는 반면, 참신한 문장이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만든 문체반정. 정조는 새로운 문화적 경향을 억압하고 언로를 봉쇄하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다. 규장각 조차 문체반정을 뒷받침하는 책만 골라놓았다 한다. 박지원은 물론 당대의 실학자 정약용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황당한 것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150년 황금기’의 청나라를 거부해놓고,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명백히 쇠락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를 받아들였다는 점. (354~355쪽) 세계 정세를 저렇게 못 읽을 수가.
저자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박지원, 정약용 등) 북학파의 주장은 그저 비주류의 아우성. 이런 경향은 21세기 현재도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계층에서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틀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서문에서 아쉬움을 밝힌다. 조선 초기와 달리 신분제는 굳어져, 한 번 노비는 대대로 기회가 없는 노예사회였으며 중산층 상당수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 이 와중에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 내는...것이 양반들의 특권이었다고 하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책 읽다 상당히 충격 받았던 이 부분은 번외편 별도로 짧게 정리 ^^;;)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경제적 궁핍에 내도록 시달렸으며...조선의 국력은 청화백자 조차 일종의 사치금지법으로 막을 지경이었던 그 시절. 오히려 채색 도자기 유행을 이끌며 중국과 일본이 각광 받은 사연을 비롯해 책은 조선의 문화와 경제, 사회와 정치를 찬찬히 살핀다.
책을 쓴 문소영 선배는 청와대 국회 등을 취재하는 훌륭한 정치부 기자였고, 글이 너무 매서운 탓인지(^^;;) 최근 몇 년 문화부에서 미술 등을 담당했다. 덕분에 도자기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비롯해 문화와 사회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엮어내는 솜씨가 매끄럽다. (단언컨대 최근 문 선배에게 밥 얻어먹은 적 없음을 밝혀둡니다. 책은..2010년에 받은게 사실이지만^^;;) 기자가 쓴 책은 사실 빤하거나 깊이 있거나 인데.. 인용 수준만 봐도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런 책을 몰라보고, 팽개쳐두었던 무심한 후배로서 뒤늦게 리뷰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책이 괜찮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얼마전 김탁환쌤의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읽고서 팔랑귀 답게 역사에 관심이 생겨 꺼내들었지만, 이제라도 읽어 얼마나 다행인지. 서론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국사학자들이 술자리에서는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늦어도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500년 넘게 왕조를 이어간 세계적으로 드문 왕조였다. 하지만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편안하게 살게 했느냐는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인 왕조는 아니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적으로 200~300년간 이어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국가를 일신했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제도개혁을 통해 나라를 혁신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이 500여 년 지속되자 혁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닐까?"
'못난 조선'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곱씹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조선의 지배층이 저질렀던 실수를 찬찬히 살펴보면, 오늘날 정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을 유지하려던 사대부들이 '딴 말' 못하게 금지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이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란게 다를 뿐인데...
21세기 한국은 사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잘 사는 나라다. 하지만 기회가 어떻게 열릴지, 촉을 세워야 마땅하다. 결론 부분에서 몇 구절 더 인용한다.
"친북 종북 낙인찍는... 그러나 묻고 싶다. 북한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로 안되나? 사회주의 종주국 중국, 과거 식민지배로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하고도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내세워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판인데."
아니 이 분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ㅠ 살짝 얼었다가...그런데 또 안될건 뭐지? "통일 없이 남한만으로 21세기를 무사히 통과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에 어쩐지 끄덕.
'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1인당 국민소득 어쩌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배타적 민족주의나 안하무인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변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노력과 개방성, 포용성, 다양성 등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정부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간단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속 역사를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록>> 메모.
부록 2>> 저자와의 메신저 대화.
선배. 조선은 역시 못났었고.. 그러니 근대화는 일제가 기여한거지.. .뭐 이런 식의 전개에 대해 대개 뭐라고 하시나요..
일제가 미쳤냐?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게??? 극단적인 사례! 창녀를 아름답게 치장시키는 것이 투자냐? 수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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