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아들이 지난해 시험에서 반 남자 아이 중에 1등이라 했다. 남편은 손자를 몹시 아끼는 시아버님께 전화까지 드렸다. 며칠 뒤 아이의 반 등수가 7등이란 걸 알았다. 스물 몇 명 한 반 학생 중에 1등부터 6등까지가 여자 아이였다. 안타깝지만, 시아버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셨다. 이것이 특이 사례인가? 아니다. 보편적이란 증거를 이제 들여다볼 차례다.
The End of Men, 과격한 제목은 여기서 따 왔고, 원 제목에는 뒤에 한 줄 더 있다. The Rise of Women. 한국어 부제는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고 붙었다. 시사잡지 <애틀랜틱>의 수석 에디터 출신 저자가 <애틀랜틱>에 연재하던 글을 보완한 책. 분명한 것은 어떤 현상에 대해 이렇게 꼼꼼하게 취재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책이 알차다는 얘기다.
과연 여성이 전면에 나섰는가? 지표는 단순하다. 미국에서는 성장 15개 업종 중 12개 업종을 여성들이 차지. 노동시장 전체로는 2009년을 고비로 역전됐다. 25~54세 여성 80%가 일단 임금 노동자. 2011년 기준 여성은 51.4%의 관리직과 전문직을 점유하고 있는데 1980년엔 26.1%였다고 한다. 회계사의 61.3%, 은행 업무와 보험 업무의 약 절반. 미국 물리학자 중 3분의 1, 로펌 관계자 45%가 여성이다.
한국도 상징적 몇 직종이 있다. 2013년 1월 수료한 제42기 사법연수원생 826명 중 여자가 40.3%인데, 우등생이 몰리는 법원의 경우 작년 여성 임용률이 64%다. 여성 법관 신규임용 비율은 2010년 71.5%에 달했다. 2012년 초등교사 임용에서 84.6%가 여자다. 비록 최상위 리더급으로 올라가면 여전히 남초 세상이지만, 변화야 새삼스럽지 않다. 저자는 “침착히 앉아 집중할 수 있는 능력 등은 최소한 남자의 주된 능력은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부인이 남편보다 더 많이 버는 것? 추세선을 보라. 담담하게 대등하거나 인정하며 사는게 낫다. 뉴욕타임즈 매거진 분석이란다. 출처 )
남자들의 후퇴는 전통적 중산층의 붕괴, 안정적이던 백인 노동 계층의 몰락과 함께 왔다. 1950년대에는 한창 일할 나이 남자 중 20분의 1이 일하지 않았다. 요즘 그 비율은 대략 5대 1.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잃어버린 5분의 1”이라고 정의하는 백수 남자들. 반면 여성들은 상승세다.
실상 여성의 활약은 놀랍지 않은데, 창의적 도전, 새로운 인력시장 창출은 인상적이다. 저자는 “여자들은 특히 홍보 대행, 와인 비평, 견과류 과자 개발자, 지속 가능성 컨설턴트, 시나리오 작가 등 줄곧 늘어나는 창조적 계급의 서열을 채워 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육아, 요리, 노인 수발 등 무급으로 했던 일에 기반을 둔 산업이 여성 덕분에 생겨났다. 여성이 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던 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됐다. 아직 엄청 대단한 일자리들은 아니지만, 이런 직업들이 꾸준히 축적되면 여성에 더 호의적 경제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에 끄덕거려 본다.
그러나, 이런 도전이 아름다운 활약상만으로 채워질 리 없다. 책은 이 현상의 다양한 이면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이제 여자들은 훨씬 더 힘들다.
지난 30여년 여자들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시간 일하게 되었지만 육아의 부담은 덜지 못했다. 아니, 실은 그 반대다. 1965년 여자들은 매주 유급 노동을 평균 6.3시간, 육아를 10.2시간 한다고 답했다. 지금 여자들은 매주 평균 23.2시간 유급노동을 할 뿐만 아니라 육아도 13.9시간 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요즘 여자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자유 시간을 적게 누리고 있다. (82쪽)
워킹맘이라면 전 세계적으로 다 불만이 있겠지만, 한국 워킹맘들이 겪는 부담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다. 선진국 중에서 한국의 근무 시간은 일본 다음으로 길다..한국에서 술자리는 유대감 형성과 인맥 관리를 위한 극한의 스포츠다…이와 동시에 한국의 아내에게 지워진 가사 부담은 20세기 초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325쪽) (저자가 이 문제를 취재하면서 콕 찍어 샅샅이 탐구한 나라가 한국이다. 직접 방문해서 가부장 사회를 뒤집는 알파걸들을 만난 이야기가 책의 한 챕터다! 것참, 어깨가 무겁다ㅠ)
저자는 페이스북의 임원 에밀리 화이트를 인용한다. “일과 가정의 균형이란 없죠. 이건 일과 가정의 통합이라니까요” 일과 놀이와 가정과 아이들과 수면이 24시간 속에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이 말에 나 자신이 직딩맘으로서 완벽하게 동의한다. 도대체 내 시간이 없다는 것이 불만이고 때로는 공포다. 사회인으로서 역할 외에 엄마 노릇, 아내 노릇, 주부 노릇, 며느리 노릇, 딸 노릇(이게 가장 미진하다)까지 하다보면, 이게 사는 건가. 세상은 “슈퍼우먼”이라는 둥 감탄도 때로 던져주지만, 가장 듣기 싫은 말이다. 운 좋게도(!) 내 옆지기는 좋은 남편이지만, 가사 일 절반이 자신의 것이라는 인식보다는 “도와줄래?”라는 말에 훨씬 잘 움직인다. 맞벌이 가정에서 집안 꼴이 엉망이고 아이들이 방치된다면 그걸 아빠 탓 하는 이는 드물지 않은가.
오죽하면 페이스북의 셰릴 샌드버그는 여성에게 강연할 때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직업적 결정은 배우자 선택”이라고 말하면서, 간혹 이렇게 덧붙인단다. “레즈비언이 될 수만 있다면 꼭 그렇게 하세요”. 여성의 일을 완전히 존중하는 남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남자는 남자. 남편을 얻는 것은 여성이 고난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니 차라리? 뭐 이런 얘기다.
여성의 활약에는 남성의 저항도 거세다. 여성이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차별. 남성을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 우대해주는 건 어떤가. 저자는 대학들이 남학생 입학 유치에 훨씬 적극적이라는 의혹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예컨대 입학 결정에 성별을 고려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주립대들은 여학생 비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사립대학교들은 남녀 성비를 절반으로 유지하는 ‘비결’은? “남학생들은 드물어서 가치가 높다”? 이른바 무시무시한 60%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남자들은 “대기만성형”이라는 둥 차별적으로 우대된다. 입학사정관의 재량이 높은 미국의 이야기지만, 사실 어디나 면접에서는 음흉한 배려가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첫 입사 때 동기 중 유일한 여자였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다음 공채 때 시험 성적 순으로 10등까지 여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웃긴 건 면접을 거쳐 그 때 입사한 여자는 역시 단 한 명. 그 이후로 몇 년간 공채에서 여자는 늘 홍일점으로 한 명씩만 붙었다. 벽이 깨진 것은 IMF 이후 직종 자체의 매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지원 인재들이 줄어든 다음의 일이다.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이 익숙한 세상에 적응중이다. 카네기멜론대 석사 졸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의 57%가 초봉 협상을 한 반면. (대학 취업지원과의 강력한 협상 권고에도) 여성은 단 7%만 초봉을 협상했다. 그 결과 남성 초봉이 여성보다 평균 7.6% 높다. 여성은 자신을 위한 협상은 꺼린다는게 저자의 분석이다. 잘나가는 것도 힘들다. 공격적으로 말하는 여성은 머뭇거리며 말하는 여성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다. (이정희를 생각해보라) 스스로를 내세우는 여성은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평가받는다. 어떤 식으로든 직장에서 분노 표출하는 여성도 마찬가지. (이래서 내가 아직 요 모양이다..ㅠ) 남성에겐 친절하고 집단지향적 행동이 선택이지만 여성에겐 의무란다. 한마디로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여만 한다.
물론, 밤에만 요부를 바라는 일부 남성들의 기대도 오래가지는 못할 듯 하다. 침대 위의 문화, 결혼 제도의 변화도 불가피하다. 저자는 ‘훅업 문화’ 취재에 공을 들였다. 원나잇 스탠드 류의 하룻밤 즐거움을 택하는 건 미국 여대생들의 새로운 트렌드. 지위 향상을 꾀하는 야심찬 젊은 여성들에게 자기계발이나 학업을 방해하지 않는 방법이다. “시간을 너무 빼앗고” “너무 몰두하게 만드는” 기존 연애관계를 대체한다. 저자는 “젊은 여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들의 성적 운명을 제어하는데 유능하다”며 “여성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잠자리를 갖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권력을 여성이 획득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건, 미국에서 요즘 10대는 부모 세대보다 성경험 혹은 임신 확률이 훨씬 적단다. 성폭행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여자가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할 때는, 학대적 관계나 상황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지만, 달라졌다는 거다.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필립 잠바르도는 ‘사회적 강도 증후군(social intensity syndrome)’이란 병명을 만들었다. (번역이 쫌..ㅠ) 청년들이 비디오게임과 포르노에 취해 ‘위상이 대등한 여성 친구’와의 관계에 적응을 못한다는 거다. 이런 걸 꼭 ‘그들의 뇌가 디지털적으로 재구성된’ 탓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여자들이 스스로 공부하느라 바빠 시험 공부하는 남자를 꾀어낼 필요 없고, 스스로 점심이나 멋진 핸드백을 살 수 있어 굳이 남자의 돈이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 특히 이 같은 현상은 가치 충돌이 극적으로 치닫는 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지금 아시아에서 부상하고 있는 문제는 유혹의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성적 무관심의 위협이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변화하는 여성과 변함없는 남성은 서로를 살펴보고는 상대가 인생의 동반자로 완전히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바람에 아시아는 짝 없는 외기러기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 현상이 몇 년간 지속된 일본은 이제 우습기까지 한 단계에 와 있다. 한 정부 조사에서 18세~334세 일본 독신 남성 중 615가 여자 친구가 없다고 했고, 거의 절반이 여자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338~339쪽)
2010년 한국 여성 평균 초혼 연령은 32세. 미국에 비해 여섯 살 더 높다. 이혼은 1990년대 이후 세 배 증가. 한국과 대만의 30대 여성은 다섯 명 중에 한 명 꼴로 독신. 일본의 경우에는 세 명 중에서 한 명 꼴인데, 인구 통계학자들은 그중에서 절반이 독신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321쪽)
20세기 산업 경제가 분해되고 있으며, 결혼 자연주의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서사 전체, 즉 직업을 가질 것이다, 애인과 결혼을 할 것이다, 집을 살 것이다, 아이들을 교육시킬 것이다, 교회에 갈 것이다와 같은 것들이 조각조각 뜯겨 나가고 있다. 이 각본은 경제적 토대 없이는 지탱되지 않는다. (137쪽)
이런 변화를 촌스럽게, 여자들이 나대서, 잘나서 문제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남자들은 이제 제3세계 지위가 낮은 여자, 순종적 여자를 밖에서 찾는다. 평등한 여성 지위를 못 견디면, 어쩔 수 없다. “남학생들은 C만 받아도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여학생들은 B마이너스 이상을 받고도 자책하는” 세상에서 서로 점점 만족하기 어려워지는 것일 뿐. 변화에 여성들이 좀 더 빨리 적응할 뿐이다. 자기표현과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굳은 얼굴의 가부장제는 단지 죽음의 입맞춤일 뿐”이라고까지 일갈하는데, 어쩌겠나.
가모장제의 특징들은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남자들은 너무 떨 필요 없다. 남자들은 약 4만 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고, 여자들은 약 40년 전부터 남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을 뿐이란다. 다만, 나는 아들과 딸을 가급적 중성적으로 키울 생각이다. 아들은 요리와 집안일에 익숙하고 탈권위적 남자로 자라주기를 바란다. 딸은 보다 도전적이고 경쟁을 즐길 줄 아는 여자로 자랐으면 한다. 너희들도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 있단다. 저자의 조언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우리는 사회적 자극에 대응하기 위해 기민함과 유연성, 즉 빠르게 변화하는 경제 상황에 맞추어 굽히고 펴면서 적응하려는 적극성을 우선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시점에, 유연한 여자는 뻣뻣한 남자보다 훨씬 나은 자질을 나타낸다.. 미래에는 뻣뻣한 남자도 어쩌면 장기간 자녀를 주로 돌보는 역할과 약자로 오랫동안 지낸 후 더욱 유연해질 수도 있다. (358쪽)
사족 : 번역이 어떤 부분에선 좀 그렇다. 나는 넘 복잡하게 꼬인 복문은 잘 못 읽어낸다. 빨간펜 직업병이 남아 있어서 단어가 거슬리는 것도 좀 못참아낸다. 간혹 있더라.
사족 2 : 책은 출판사 지인 L님 덕에 받은 것. 구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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