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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리뷰/비소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시민이 된다는게 힐링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저자
파커 J. 파머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2-03-26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정치에서 마음은 중요한 원동력이다!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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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고통, 힐링이 필요해

우리는 테러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편집증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개개인은 고립되어 고통받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개인적 집단적 운명이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59)


아마
, 우리의 운명이 이상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좌절로 책을 펼쳤던 같다. 대선 얘기다. 기자 시절엔 정치부는 절대 내게 맞지 않는다며 멀리 했건만, 이제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나만 그럴까. 트위터 타임라인엔 온통 정치 얘기 뿐이다. 정치 피로감에 시달릴 정도다. 그러나 어느 진영을 지지하든, 정치에 흡족한 이가 있을까? 정치를 생각하면 답답하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고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투표권을 행사한 대한민국 국민 48% 멘붕에 시달린단다. 고통을 어찌할 것인가.

책의 원제는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부서진 마음으로 비통한 우리에겐 힐링이 필요하다. 정치적 스펙트럼에 상관 없이, 상대에 대한 분노, 나라에 대한 걱정은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일 터. 우리는 모두 왜 그리 절박했을까.

 


상대는 악마가 아니다
. 수꼴도 좌좀도 아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첨예하게 맞붙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민주주의다. 저자는 E. M. 포스터를 인용, “민주주의는 긴장을 끌어안기 위해 고안된 제도라고 전제한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환호하는 것은 다양성을, 그리고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란 거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고, 창조적 갈등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사회 변화의 힘으로 사용할 있도록 고안된 이다. 당파주의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것이 문제다언젠가 "모두 사이좋게 지낼 "이라는 환상을 좇지 않는다. 아무리 대화해도 합의에 이를 없는 이가 좌파와 우파에 각각 15~20%..뒤집어보면 차이를 넘어 배우고 대화할 있는 이가 60~70%. 민주주의에서 정도면 곤경 벗어나는데 충분하고도 남는다. (55)

나는 갈등이 없는 공공영역을 상상하지도 염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죽음이 없는 삶의 염원과 비슷. 전체주의 사회에서만 갈등은 추방된다... 건강한 민주주의 속에서 공적 갈등은 불가피할 아니라 장려되어야 한다.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는 것은 창의성을 북돋아준다. 그리고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등을 둘러싼 여러 비판적 질문에 판결을 내릴 있도록 해준다. (117)

낯선 사람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있다.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안에서 하나라는 , 어떤 차이들은 삶을 풍부하게 하고 골치 아픈 차이들은 타협될 있다는 , 갈등하는 이해관계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거래할 있다는 등이다.. 이런 종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가 사회 속에 풍부할 , 우리 국민은 철학적 관념이 아니라 생동하는 실체가 있다. (170)

자신의 신념을 에게 돌처럼 던지는 대신 고통의 근원을 서로 나눌 때, 우리는 마음을 열고 커다란 분리를 연결하는 통로를 찾을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너무나 교과서적임에도 울림이 있다. 올곧은 신념의 소유자라기보다 실리적인 나는 이른바 수꼴과 좌좀까지 설득하고 품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에 솔깃하다. 차이를 넘어 대화할 수 있는 국민이 양 극단을 빼고도 충분히 많은 건 분명하다. 국내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념 지형에서 중도 보수보다는 극우보수를 보수로, 중도진보를 종북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실제로는 건강한 중도 보수 혹은 진보라고 자평하는 시민이 훨씬 많지 않겠나.

 

정치로부터 따돌림 당하지 말자

민주주의는 광장이다. 아고라다. 누구나 대화에 참여할 있다. 그러나 유권자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조직되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환영 받았을 리가. 시민의 움직임은 종종 기득권, 권력의 저항에 부딪치곤 했다. 영국의 찰스 2세는 1675 당시 유행이던 커피하우스에 폐쇄 포고령을 내렸다. 시민들이 그런 장소에 모여 두런두런 으쌰으쌰 떠드는 자체가 불온했다. 사교와 담론의 공간, 공론장은 권력에게 불편한 . 무지몽매 하도록, 우민화 정책을 쓰는 편이 종종 선호됐다.

현대사회에서 시민의 참여를 방해하는 것은 다양해졌다. 모퉁이와 광장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광장 대신 쇼핑몰에서 모인다. 쇼핑을 경제 살리는 애국이라 여긴다. 걸인과 노숙인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쇼핑몰에 사람들이 스스로 갇히면서, “주변화된 사람들은 시민적 공감의 망으로부터 멀리 밀려난다 지적이다. 혹은 그저 개인으로 돌아가 사생활에 몰두한다. 민주주의 인프라인 공공성이 위축되는 현실에 무심해진다. 공공연한 정치 행위는 금지되거나 손가락질 대상이다. 최근 네이버는 대선 직후 추천 자문단에게 오늘의 선정 기준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라고 했다가 철회했다. 담당자 실수에 의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됐지만 실제 우리 사회는 정치적인 모든 행위에 냉소적이거나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성을 배제하라는 기준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이용자의 반발은 타당하다. 소셜테이너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치와 사회 이슈에 관심 갖는 유명인사에 대한 부당한 편견도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시민은 누구나 떠들 권리가 있다. 원하는 모든 이슈에 대해서. 정치적 커밍아웃은 민주주의 시민의 자연스러운 행위다. 자꾸 다물라고 하는 이들부터 다물 일이다.

더불어 민주적 마음의 습관은 사실 교육 문제다. 저자는 호기심과 책임감, 그리고 시민 정신이 요구하는 주체성을 키우지 못하는 공교육에 대해서도 한탄한다.

학생들은 어른들이 구성한 사소한 문제 이외의 사안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는 대우받고, “성취 책임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는다. 그렇게 해놓고 우리는 그들이 18세가 되는 순간 참여 민주주의에서 충실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으로 변신하기를 기대한다. (211)

대목을 읽는데 순간 멈칫했다. 우리는 떳떳한가?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정치로부터 멀어지고, 사생활에만 몰두하는 모두가 사실 진지하게 돌아볼 문제들이 있다.

공적인 삶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싶으면 사생활과 정치 사이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층위가 없는 사회를 생각해보라.. 세계는 권위주의, 정체주의, 귀족주의, 전제주의 그리고 파시즘 등으로 가득 것이다. 중앙에 집중된 권력은 견제 없이 군림하고, 사생활에 자유롭게 침범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보호하려 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권력의 남용에 저항하려면 개인적으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은 처벌받을 있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그리고 실종자의 반열에 들어가는 실로 광범위하다..권위주의 사회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권력이 책임질 있도록 견제하고, 남용으로부터 개인을 지키는 공공 영역이 없으면 민주적 통치체제도 , 안전한 사생활도 성립하지 못한다. (173)


지난 5 해직 언론인이 17명이다. 또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가, 북한을 조롱하는 트윗을 했다가, 대통령을 쥐에 빗대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가 감옥에 갇혔다. 미국 CNN 한국에서는 농담하다 감옥 있다 보도했다. 우리는 공공성을 회복해야만 하는 절실한 상황이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무엇을 것인가. (Shto delati?)

저자는 일단 각자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상당히 고차원적으로 들리는 해법을 내놓는다. 내면에 대한 탐구다. 실상 내적 공허감이 소비주의로 마비되거나, 희생양 만들기로 이어져 공동체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반대급부를 감안하면, 진지하게 들어야 제언이다. 저자는 자기 내면의 그늘을 인종, 사회계급, 종교,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면서, 자신에게 결핍된 것의 탓을 그들에게 돌린다. 다른 이들을 깔아뭉개고, 그들의 열등함을 배경으로 우리의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정체감을 회복한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희생양 만들기는 파시즘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질병을 키운다 지적한다. 무서운가? 그렇다면 내적 공허감을 방치하지 않으면 되지.

실제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도 흥미롭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본분을 다하는 것은 실제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지속가능성보다 단기적 이윤을 먼저 따졌던 미 농무부의 공무원은 상사가 아니라 땅에게 대답하겠다 결심을 하게 된다. 침묵 속에 경청하는 이들 앞에서 의사는 보건시스템의 부조리함을 고백한다. 자기 나름의 내적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일에서 벗어난다.

이런 성찰은 요즘 같은 미디어 환경에서 특히 절실하다. 저자는 미디어로 인해 왜곡되는 현실 감각을 지적하는데 ( 부분은 따로 정리했다. 링크) 통찰력을 쌓는 노력이 불가피하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견해와 정보의 소비자와 생산자로 나서면서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싶지만,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따져보는 노력, 옥석을 가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말짱 꽝이란 얘기다.

그리고 같은 성찰을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지 말자.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 아닌가.

우리도 뭔가를 해낼 있다. 통제할 없는 어떤 힘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환상에서 자유로울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정치라고 하면 멀리 있는 권력의 중심 의회, 로비스트, 당직자, 이사회 떠올린다. 이것은 잘못이다..공공선이 실현되려면, 시민들이 그런 지역적 장소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면서 모두에게 영향을 기치는 사안에 대해 결정할 최선의 지도자들을 지지하고 최악의 지도자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64)

우리는 출근이나 쇼핑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자주 외출할 있다. 우리는 정치 집회에 참석할 있고, 지역 농산물 시장에서 장을 있으며, 공공 도서관을 방문할 있고, 콘서트장에 있다. 어떤 필요를 채우고, 어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일단 공적인 선택을 실험하기 시작하면 불편함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생명을 주는 특징이 있음을 배우게 것이다. (181
)

중대한 사회 변화는 흔들의자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직하게 말하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과 세계에 대해 배운 바에 입각해 당차게 행동할 기술을 계발한다면 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 (260쪽)


공공성을 회복하고, 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비통한 자들끼리 퍼먹는 사회가 될지 모른다. 시민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우리를 다스리는 이들을 견제할 힘을 가질 있다. 그렇게 국민의 목소리가 등장해야 제도적 정치권력의 공간에 반영될 여지가 생긴다
.

현실과 열망의 간극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비통함에 허우적댈 때가 아니다. 희망을 가지고 견디고 행동해야 한다. 저자는 현실로 너무 많이 기울면, 정신을 좀먹는 냉소주의에 빠질 있고, 열망하는 것의 가능성에 집착하면 뜬금없는 이상주의로 빠질 있다고 마지막으로 조언한다. 나는 이상 절망하거나 냉소하고 싶지 않다. 레미제라블 노래에 훌쩍이며 역시나 마무리는 영화적으로 모든게 잘될 거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걸음씩, 자리에서, 무엇인가 찾아가는 일을.. 남은 인생 내도록 해야겠다고, 착한 결심을 일단 해본다. 이것이 힐링의 걸음이고, 상대방을 악마화하거나, 절박한 인간을 외면하는 폭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꽤나 리뷰가 되었지만, 어쩔 없다. 글이 너무 착한 탓인지, 뜬구름 잡는 것처럼 여겨졌는지, 중간중간 더디게 읽혔으나 마지막까지 독파한 것은, 나를 위한 힐링이다. 저자가 인용한 하워드 진의 말로 마무리한다.

정의를 위한 투쟁의 핵심 요소는 잠깐 동안만이라도,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동안이라도 걸음 나서면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작고 비영웅적인 행동들이 불쏘시개로 쌓여나가다가 어떤 놀라운 상황에서 격렬한 변화로 점화될 있다.

 

비통한자들을위한정치학_메모.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