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광인>문장에 취하고 사건에 빠졌으며 이치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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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문장에 취하고 사건에 빠졌으며 이치를 엿보았다

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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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상)백탑파,그세번째이야기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역사/대하소설
지은이 김탁환 (민음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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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대, 나는 단 하나의 금서를 만났고 그로 인해 평생 불행했다."
 
 드라마틱한 고백. 김탁환다운 시작이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화려하게 춤을 추는 문체를 자랑하는 작가의 문체반정 팩션 스토리다. 더할나위 없이 맞춤하다. 글쟁이로서,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재능에 푹 빠졌으나 마무리가 힘이 없지 않냐고 전작 `리심'에서 투덜댔다. 늘 배고픈 독자의 투정은 이번 작품에서 채워진다. `열하광인'은 힘있고 아름다운 글의 품안에 허우적대면서 추리소설의 묘미를 따라갈 수 있다. 비록 지나치게 많은 `고어'가 집중력을 떨어뜨리지만, 옛말을 가급적 많이 사용하는 것도 시대를 잇는 작가의 한 책무가 아닐까 싶다. 독자로서도 불평할 대상은 아니다.

 찬사 일색인 것은 이 작품이 내 취향에, 무엇보다 최근 내 관심에 아주 흡족했기 때문이리라. 담백하고 서늘한 글도 좋지만 때로 몰아치고 날아가는 글도 좋다. 주인공인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자신의 일생을 망가뜨렸다는 금서 `열하일기'에 대해 고백하는 대목을 보자.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독하고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난폭하다. 스스로 활활 타올라 읽는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단숨에 삼키는 책이여!...책은 혼돈을 일으키는 불꽃이다. 어느 대목을 읽든지 처음에는 뜻밖의 온기에 휘감겨 허리를 숙이고 콧잔등에 책을 댄다. 그러나 곧 두 눈과 열 손가락과 단 하나의 심장이 타들어 가듯 뜨거워진다. ....이 책은 철저하게 혼돈만 이어 간다. 그 혼돈은 쇠종처럼 무겁다가도 깃털처럼 가볍다. 웃음 한 송이를 꽃어럼 피워 문다. 각 편 말미에 닿아서 여백을 우두커니 보고 있노라면, 책이 묻는다. 이 다음 혼돈은 네 몫이야. 어떻게 할래? 그 물음이 무서워 다시 책을 펼친다. 악순환이다. 업보다. 시작도 끝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문장이 뜨겁다. 차갑고 건조하며 우아한 품격 대신 내지르고 토해내는 글이다. 하기야 `열하일기'에 미친 이가 광인의 자격으로 풀어낸 고백이다. 더구나 격변기에 치명적 사건의 한 복판에서 내놓은 글이다. 부드럽고 여유만만하다면 어울리지 않는다. 글에 새삼 감탄한 것은 이른바 백탑파 시리즈 3부인 `열하광인'에 감탄해 뒤늦게 찾아본 1부 `방각본 살인사건'을 읽다보니 몇년 세월, 작가의 내공이 더 깊어졌다는 느낌 덕분이다. `방각본 살인사건'에 비해 `열하광인'의 문장이 더 치열하고 촘촘하다고 할까.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무릎을 친 이유는 따로 있다. 최근 개인적으로 `정치적 감각'에 관심을 두었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놓치않아야 할 원칙, 리더쉽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가슴을 지배하는 열정과 순수함만으로 조직을 이끌 수도 없다는 것을 실감했고, 체스판 위의 말을 어떻게 움직여야 내가 원하는 `차선'을 얻을 수 있을지 연구했다. `최선'은 원론주의자들이 외칠 수는 있어도 리더가 얻을 가능성은 적다. 적과 싸우는데 효과적인 전술, 내가 잃는 듯 얻는 것과 얻는듯 잃는 것들에 대해 고민했다. 백탑파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조의 행태는 그래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군왕은 군왕의 도리만 따른다는 비정한 법칙과 그 구체적 사례에 대해 잘근잘근 씹어보게 됐다.

 주인공 이명방은 끊임없이 묻고 묻는다. 성리학 중심의 전통 수구집단에 맞서, 실용적이고 현실적 이치를 추구하며 개혁을 꿈꿨던 백탑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거울이 되어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탐독하는 그 무리의 재능을 군왕인 정조께서도 아끼지 않았던가. 왜 백탑파를 내치려 하시는가. 진정 `열하'를 금서로 단정하고 백탑파를 뒤흔드는게 군왕의 뜻인가. 빛나는 글들을 쓴 죄를 인정하고 자송문(반성문)을 쓰는게 진정 군왕이 원하는 일인가. 십수년 측근으로서 충심으로 모셨던 자신을 이런 상황에서 믿지 못하시는 건가. 정조의 아비를 뒤주에 가둬죽인 그 세력들과 정녕 뜻을 같이 하시는 건가. 대체 어느 누가 백탑파를, `열하일기'를 몰래 읽었던 `열하광'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가.

 이명방이 어렵게 깨닫고 찾아가는 해답들. 거기에 시대의 답이 있고, 한 사회의 정치적 답이 있다. 때로 틀린 답일 수도 있고, 시대를 역행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또한 그 당시 상황에서 다른 길이 가능했는지 찾아봐야 한다. 리더에게는 그의 한계가 따로 있다. 그러나 리더를 따르는 무리의 길도 따로 있다. 리더의 뜻에 반하는게 때로 그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일이 되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다. 리더의 고민이 그러하다는걸 짐작하고, 한수 더 넘어 생각을 한다면 리더를 옴쭉달싹 못하게 몰아붙일 수도 있는게 또 군중 혹은 엘리트의 힘이다. 하여 세상을 움직이는 건, 누가 더 많이 다음수를 내다보고 전략을 짜느냐에 많이 좌우된다. 물론 역사의 묘미란 이같은 전략이 때로 흔들리고 깨지는데에 있겠지만...이제는 슬슬 수를 내다보는 사람이 되고싶다. 나 역시 나이가 들었다.

 다만 책을 마치 처세서, 병법서처럼 읽었다면 이 책의 본질을 무시하는 일이다. `열하광인'은 좋은 추리소설이다.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눈앞에서 버젓하게 혹은 꿈결에 속은듯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새 이명방은 기막힌 음모에 휘말리고 우리의 주인공,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예 출중한 액션스타에 심지 굳고 로맨스까지 펼치는 주인공. 그리고 그런 주인공의 벗, `화광' 김진이 등장한다. 꽃미치광이 김진이 마치 셜록 홈즈처럼 사건을 풀어가는 재주는 신기롭다. 더구나 김진은 한수가 아니라 두세수 앞을 내다보고 모든걸 꿰뚫어보는 자. `방각본 살인사건'에서도 놀랍지만 김진은 지나치게 천재적이라 현실감이 떨어지는게 흠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범인이 누군지 중후반부터 의심스럽더니만 역시나 그 사람이다. 워낙 미궁에 빠진 사건이다보니 오히려 트릭이 보인다고 할까. 다만 그 범죄의 동기는 의외의 반전으로 풀린다. 추리소설 자체로도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고......정조 시대, 매력적인 백탑파...신념으로 뜨거웠으며 의리와 우정을 중히 여겼고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법을 알았던 이들의 이야기. 1부 `방각본 살인사건'을 다시 찾아 읽었으니...이제 2부를 아껴가면서 볼 생각이다.  (20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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