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리뷰/비소설

<싸울 기회> 엘리자베스 워런, 미치도록 감동적이다

마냐 2016. 2. 14. 23:21

기회의 나라, 미국은 과거일 뿐


아버지는 건물 정비원, 어머니는 백화점 전화교환원이었다.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는 시대에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했으나 결혼하면서 바로 중퇴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지방대 법대를 졸업하고, 간신히 강단에 섰다. 파산법 연구와 강의에 힘쓰다가 파산의 위기에 놓인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는 운동에 나섰다.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서 금융 감독 자문 활동에 적극 나섰고, 62세에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이 됐다. 

 

엘리자베스 워런 Elizabeth Ann Warren, 그러나 그녀의 자서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신은 아이들의 미래에 투자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란 덕분에 운 좋게 성공했으나, “현재 미국에는 그런 미래가 없다”고.

  

“세상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도록 게임의 판세가 조작돼 있습니다. 대기업은 로비스트를 고용, 수십 억 달러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조세제도의 구멍을 만들고, 의회 인맥을 동원해 이 편향된 게임을 유지해주는 법들을 지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냉엄한 진실을 털어놓는 그녀는 말한다. “저는 미국이 다시 성실하게 원칙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회의 땅이 되도록 돕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고 굳게(아주 굳게) 다짐했습니다. 일부가 아니라 모든 아이를 위한 미래,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를 주는 나라인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무슨 자서전이 소설보다 재미있냐. 그의 삶 자체가 ‘기회의 나라, 미국’의 상징이지만 그냥 성공담이 아니다. 약자와 공정한 미래를 위해, 골리앗들에게 불굴의 용기로 맞선, 지치지 않고 싸운 이야기다. 자신의 인생을 과거 회상 장면을 보여주듯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는 대목은 소설 같고, 그녀가 싸운 이야기는 미국의 금융위기가 어떻게 된 것인지, 미국이란 나라의 정치와 정책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백서나 다름 없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이야기하듯 쉽고 분명하게 전달된다. 하기야 그녀는 “어려운 단어”로 소비자들을 기만한 금융기관들에게 분노하고, 쉬운 단어로 다시 써온 장본인. 알 수 없지만, 하버드 로스쿨 교수 가운데 가장 쉽게 글을 써주는 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    


평범한 시민들이 무너진다


파산한 사람은 모두 꾀죄죄하거나 어딘가 구린데가 있어보이거나 평판 안좋은 사람이란 통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들 모두 아주 정상적으로 보였다. 파산 신청 대다수는 살기 힘들어진 평범한 가족이었다. 실직, 의료문제, 가족해체 등으로 인해  

우연히 파산법에 뛰어든 그는 법정에서 파산 신청을 하는 이들을 만난다. 파산의 실체에 대해 연구하며, 진실에 접근한다. 멀쩡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배경을 보니, 은행이 나빴다. 은행은 어려운 이들에게 계속 대출을 해줬다. 금리와 수수료가 높아서 사람들이 파산하더라도, 일단 거둔 수익이 더 컸다. 마지막 한푼까지 더 많이 뜯어내기 위해 파산이 쉽지 않도록 파산법을 바꾸려 했다.    

그는 “회복의 마지막 기회를 잃게 될 가족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인데…은행들이 권한 개정 파산법 조항은 과도하게 복잡했고, 그들에게 유리했다. 언론과 대중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해서 은행업계의 진짜 의도를 감쪽같이 감출 수 있었다”고 전한다.  


한 세대가 교체되는 중 중산층은 엉망이 됐다. 꾸준히 오르던 임금은 인플레이션 감안, 70년대 인상을 멈췄다. 의료보험 교육 비용이 올랐다. 집값이 급등했다. 10년 간 1500만 가구가 파산 신청을 했다. 수백만 가족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2001년. 부모 이혼 겪은 아이보다 부모 파산 겪은 아이가 많아졌다. 대학 졸업 여자보다 파산 신청 여자가 더 많아졌다. 암 진단을 받는 사람보다 파산 신청이 더 많아졌다..대체 미국은 뭐가 잘못된 걸까.     


결국 주택담보시장이 붕괴됐을때 수백만명이 그 함정에 빠졌다. 대출금을 갚을 수도, 이자가 더 낮은 대출로 갈아탈 수도, 집을 팔 수도 없었다. 2008년 말 대출 낀 집을 보유한 5명 중 1명은 집값보다 부채가 많았다. 중산층도 같이 침몰하고 있었다.      


대마불사, 탐욕의 거센 저항


미국을 금융위기로 몰아넣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금융기관이 주요 고객인 신용평가 회사들은 부실 덩어리 모기지 패키지에 좋은 등급을 매겼다. '규제 철폐'가 마법 주문 같은 시대, 아무런 규제가 없었다. 시한폭탄 모기지 패키지에 대해 경고도 없었다. 

자기 분야의 현실에 놀란 그녀는 금융위기 이후 전개에 더 놀란다. 일단 대마불사. 유치원을 짓거나 의료 연구에 쓸 돈이 없다던 의회는 은행 구제에 7000억 달러를 내놓았다.

       

TV엔 위기논평이 넘쳤다. 자산담보부증권이니 특수목적회사니..전문가 설명은 따지고 보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인사이더 밖에 없으니까 그냥 우리를 믿고 맡겨'..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싸웠다. 이긴 부분도 있고, 진 부분도 있다. 대마불사는 막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중소 은행들을 더 빨리 도와달라고 재촉도 못했단다. 재무부가 거대 금융기관을 세금으로 살려주고, 그 CEO들이 수백만 달러에서 수억 달러씩 보너스와 스톡옵션을 챙기는 동안 (관련 기사) 300개 소규모 은행과 신용조합이 쓰러졌고, 17만개 기업이 파산했다.


제대로 된 금융 감독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녀는  재무부 특별 자문기구 활동에 이어 미국 소비자재정보호부(U.S.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의 설립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월스트리트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다.


금융업계는 중요한 금융개혁 법안들을 죽이기 위해 로비와 캠페인 자금으로 하루 100만 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난 아직도 궁금하다. 덧붙여 영향력 있는 의원들 재선을 위해 어마어마한 선거자금을 기부하고 있다.  

그가 결국 직접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공화당의 상대방 후보를 위해 후원금 3500만 달러(약 420억원)를 퍼부었다. 만약 정치가들이 이렇게 선거자금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면? 금융위기때 정치인들 반응이 달랐을까? 거대금융 구제하는데 덜 신경썼을까?    

당시 그의 선거는 그해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이 쓰인 선거로 기록됐다. 월스트리트에 맞서 소비자 권리 보호에 앞장선 워런에게는 무려 4200만 달러(약 503억원)가 모였다. 어마어마한데 더 엄청난 건, 이 가운데 80% 이상이 50달러 이하 소액 후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토욜밤까지 알바로 학비 버는 청년은 워런에게 말한다. "매달 당신에게 후원금을 보내요. 더 내려고 일을 더하고 있어요". 짠해진 워런이 괜찮다고 하자 청년은 말한다 "아니에요. 저도 이 선거에 참여하고있어요. 이건 내 싸움이기도 해요" 


공평한 룰을 막지 마


선거 기간, 그는 월스트리트의 은행이나 부자들이 제대로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나라에서 혼자 부자가 된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당신이 공장을 지었나요? 잘했습니다. 다만 당신은 세금으로 만든 도로를 쓰고, 세금으로 교육한 이를 고용하고, 세금으로 유지하는 경찰과 소방관 덕분에 안전. 당신 미래를 위해 세금을 내주세요 


그는 식당사장 신생기업 배관공 간병인 세탁소와 술집 주인들을 만났다. 그가 당선되면 세금이 걱정된다는 이야기에 되물었다. 케이맨 제도 비밀계좌에 얼마나 숨겨놓으셨죠? 조세피난지에 지식재산권 많이 옮기셨죠?


진짜 전쟁은 "재계 친화적이냐 정부 친화적이냐"가 아니다. 진짜 전쟁은 모두 공평하게 세금을 내는가 아니면 서민만 내는가, 바로 이것이다. 대기업들은 로비 군단을 고용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 원래 내야 하는 이윤의 절반도 안되는 세금  
       

기업과 노동자가 동전의 양면? 세금시스템 허점과 특혜를 위해 기업이 로비하는것과 사회보장연금과 동등한 임금 위해 노조가 싸우는게 같은 성격의 싸움이라고? 기업이 노동권 관련 법을 지원하지 못하게 돈을 쓰듯 노조가 회사 망하게 같은 돈을 써?    


싸우면 이긴다는 교훈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서투른 대처, 금융위기에 이른 무수한 실패 등 정부 실패에 대해 "그럴 줄 알았어" 신랄하게 비난하거나 체념하는 건 올바른 반응이 아니다. 올바른 반응은 격노하는 것. 우리는 우리 정부를 좀더 높은 기준에서 평가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 분노해 어깨를 맞대고 싸운다면.. 싸우면 이긴다는 교훈을 얻었다. 


학자금대출 1조. 젊은이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미래가 박살난 느낌. 왜 미국 정부는 대형은행에 1% 이하로 돈을 빌려주면서 학생들에게는 9배나 높은 금리를 물리는가


그는 상원의원이 된 뒤, 학생들이 대형은행과 같은 금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 법은 원안대로 통과되지 못했으나 향후 10년 학생들 부담을 150억 달러 줄이는데 성공했다.


그는 싸움을 두려워한 적 없다. 성공한 남자들이 이너서클을 만들고 권력을 누릴 동안, 약자와 아웃사이더 입장을 고수했다. Time지가 '월가의 보안관으로 워런과 연방예금보험공사 총재, 증권거래위원장 3인을 인터뷰할 때, 셋은 여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금융업계 CEO중 여자 거의 없는데 그들이 저지른 사고의 설거지는 모두 여자가..아웃사이더들. CEO 넷 짝 맞춰 골프를 치지도, 클럽서 시가를 피우지도 않는 여자들.


그가 계속 싸운 것은 절망에 빠진 이들이 끝없이 찾아와 "이겨 달라"고, 희망을 보여달라고 했기 때문. 정치인 이야기를 읽다가 훌쩍 거리기도 오랜만. 여성의 감수성을 어떻게 훌륭한 에너지로 바꿨는지도 감동적이다. 힐러리 클린턴 대신 2016년 대선 출마를 염원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빌려준 C님은 새해 첫날 새벽 2시까지 책을 보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다시 책을 들었다고. 문학을 했어도 대단했을 입심과 글빨이다. 미국의 당시 이슈가 생생하고 쉽게 쓰인 것도, 한 인간의 용감한 도전이 주는 감동도 장점이지만 한 가지 더. 미국의 정치와 정부 정책이 실제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리얼하다. '하우스오브카드' 못지 않게 박진감 넘친다. 오늘 잠시 수다 떤 H님이 말했듯, 정치 관련 보도가 정쟁에만 사로잡힌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없다. 이런 종류의 투명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의 근거가 될텐데. 미국의 시스템도 월가 자본에 농락당하는 등 문제가 많지만, 선거철 흑색선전에 앞장서는 미디어 등 한심하지만, 정책 대결은 대단하다. 여러가지로 별 다섯이 아니라 500개 쯤 드리고 싶다. 


아참, 그의 두번째 남편이자 역시 부인 따라 하버드 로스쿨로 옮긴 브루스 맨 의 외조도 매우 인상적. 닭살 돋는 부부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곳곳에 따뜻함을 더한다. (사진은 그의 페북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