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로마>위대한 문명을 만나면 두근거린다

마냐 2013. 8. 22. 08:30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덕분에 딴 길로 두 번 샜다. 자동차 여행자의 특권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피렌체에서 1시간 거리의 피사. 남들 다 하는 대로, 기울어지는 사탑을 떠받치는 자세로 온 가족 차례로 인증샷.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조차 장관이다. 그러나 기울어진 탑 만큼 멋지랴.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사탑의 아우라가 실제 봐도 명불허전. 특히 그 와중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꼭대기 부분을 살짝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뜨린 당대 건축가들의 고민이 인상적이다. (피사의 사진은 생략. 솔직히 궁금할 이가 없을 듯ㅎ)

그리고 치비타 디 반뇨레죠(Civita di bagnoregio).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천공의 섬', 로마에서 1시간 거리다. 풍화와 지진으로 작은 마을이 구릉 위에 얹어져 있고, 가느다란 다리 하나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한 때 사람들이 다 떠나 '죽음의 마을'로도 불릴 만큼 스산한 분위기. 동시에 꽃 정원과 덩굴 담장, 나른한 고양이들이 보이는 그림 같은 마을이다. (화보를 보면, 해질 무렵이거나 해뜰 무렵의 어둑한 때, 빛이 덜 할 때 제대로 모양이 사는 동네 같다. 이날은 너무 쨍했다) 


아이들이 폴짝 뛰는 사진은...옆지기의 단골 컷. 배경 좋은 곳 마다 시도한다. 날이 더웠다. 딸은 촬영 거부.


반뇨레죠에서 로마 가는 길에 오르비에토가 있는데 그냥 지나갔다. 고대 에르투리아 12도시 가운데 한 곳이라는 둥, 절벽 위에 세워진 중세도시의 면모가 남아있다는 둥...그것보다 아쉬운 건 10여 년 전 국제부 기자 할 때 '슬로푸드'와 함께 '느리게 살자'는 '슬로시티' 운동의 발원지로 관심 가졌던 도시인데..그걸 까먹고 있었다. 실제 볼 기회가 왔었고, 별 생각 없이 놓쳤을 줄이야. 

그리고...드디어 로마...... 
이번 여행의 종점. 결론부터 말하면 '올 킬'이다. 그동안 봐왔던 모든 서양 문명사의 정점에 있는 도시. 오래된 아름다움, 완벽한 서사. 파리부터 시작해서 스위스 보고 피렌체 찍고 로마로 넘어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콜로세움, 유료 입장 대신 그냥 겉만 구경하는 일정이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더 열심히 가이드님 설명을 들었다...기 보다, 진짜 흥미로웠다. AD 80년에 만들어진 건축물인데 계급별로 다른 입구가 80개, 5만5000명이 빠져나가는데 15분 걸렸다나? (고대 기록 어디에 저렇게 분까지 맞춰 나오는지 쪼금 궁금) 상암 경기장에서 6만명이 빠져나가는데 얼마나 걸릴까. 극적 등장을 위한 무대 장치, 그늘만 있으면 시원한 지중해성 기후 특성에 따라 꼭대기 층에는 차양을 쳐주는 기술 등 놀라운 이야기는 끝이 없다. (노예를, 정복지의 남자들을 검투사로 동원해 당대의 명 짧은 아이돌 스타로 만든 역사에 대한 감상은 다음 기회에...) 

고대 로마는 어떤 문명사를 쓴 걸까. 그 시절에 수도관을 깔았다는 것 자체가 신비한 일. (오른쪽 아래 사진도 그 일부) 검색 신공 좀 동원해보면 9개의 수도관이 수십 km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와 11개의 커다란 대중목욕탕과 850개의 욕조, 135개의 분수, 각 가정에 물을 공급했다는 도시다. 도시 로마가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배경은 로마 방식으로 길을 깔아주고 물을 해결해주는 등 정복지의 생활을 바꿔준 덕분이라는 (승자의?) 역사 해석도 있다. 
해부학도 발달해서 그 시절에 발견된 해부 도구만 20여 종인데.. 그 중 10여 가지는 현대 의학에서도 활용된다고 한다. 2000년 전 해부학이라니. 로마의 문명 수준에 대해 감탄하던 와중에... 313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 '신의 뜻에 거슬러 병든 인간을 살려내는 기술'이 배척당했던 역사를 귀동냥 했다. 의학 기술의 발전이 신에 대한 반역인가? 어디 이 기술 뿐일까.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탐구와 모색을 중단시키고 신의 뜻만 외우는 시대로 만들다니. 찬란한 기술 문명이 1000년의 암흑기를 맞이하다니, 기독교는 대체 인류 문명사에 무슨 일을 한 것인가. 믿음 없는 이는 개념 없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에게 돌 맞을 얘기에서 삼천포로 빠져보면... 오른쪽 윗 사진, 나보나 광장의 야경인데... 저녁에 가면 끝내주는 음악과 페인팅 퍼포먼스를 구경할 수 있다. 공연에 반해서..결국 CD도 샀다ㅋ 




고대 로마의 문명의 흔적은 비교적 생생하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 Foro는 공공광장? 아고라 같은 개념일까? forum 의 어원이란다. 정치와 종교, 상업의 중심지. 기둥 몇 개 뿐이라지만, 전성기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근사하다. 상당히 스케일이 커서, 제대로 보려면 반나절 돌아봐도 재미날 수준. 주마간산 여행객은 멀리서 사진만 찍고 말았다만, 저런 유적을 지켜보는 건 어쨌거나 두근거리는 일이다. 거의 대부분 묻혀 있어서 보존이 됐다는데, 저 정도라도 복원되다니 후손들의 복이다.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얽힌 서울을 비롯해 파리, 도쿄 등의 대도시와 달리 로마는 지하철 노선이 달랑 2개 뿐이다. 유적이 많아 함부로 땅을 파지 못한다니ㅎㅎ) 



사실 포로 로마노와 함께 원근법을 조작, 밑에서 보면 낮아보이도록 설계된 미켈란젤로의 계단(Cordonato)이라든지, 가까이 보면 각 진 직선들인데 하늘에서 보면 곡선으로 설계된 깜삐똘리오 광장의 바닥 조경이라든지..이 대단한 고대 옵바들에게 감탄과 감탄을 거듭하던 중... 완전히 매혹당하는 상황을 맞이했으니, 바로 판테온(Pantheon)이다. 

이름은 주어들은 바 있어도, 무엇인지 잘 몰랐던 곳. 단 하나의 신을 영접하기 이전, 그리스인들의 영향에 따라 로마인들이 사랑하던 제우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등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 즉 '만신전'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Pan(Παν)은 all, Theon(Θεον)은 gods. 609년 교황 보니파시오 4세가 동로마황제로부터 넘겨받아 카톨릭 성당으로 바꾸면서, 경배하는 신이 바뀌어버린 건축물. 

하지만 이 정도였으면 그리 반했을까. 미스테리한 문명의 결정체, 이런걸 좋아하는 내게 판테온의 건축기술은 또 하나의 신비였다. (내가 이런데 꽂힌 건.. 앙코르와트 여행 당시 거품을 뿜었던 책 '신의 거울' 덕분이다) 

판테온의 직경은 43.3m.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와 같다. 기원전 27년 처음 세워졌고 서기 80년 불탔다가 126년에 개축됐다. 가이드님의 말에 따르면 현대 기술로도 지을 수 없는 돔이란다. (이건 좀 뻥 같기는 하다) 원래 돔 건축은 아치와 마찬가지로 정교하게 받쳐주는 힘을 구상해서 쌓아올려야 하는데, 여기엔 구멍을 냈다. 저 구조물은 어떻게 지탱되는 걸까. 철근이 들어있지 않은 4,535톤 중량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콘크리트 돔이란 말이다. (역시 추가 검색 좀 해보면..밀도가 낮은 콘크리트를 돔의 높은 층에 사용했고 두께조차 아래 부분의 벽은 5.9m, 위는 1.5m로 하중을 줄였단다) 구멍의 지름은 약 9m인데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쳐도 딱 아래 9m 넓이의 바닥에만 비가 쏟아진단다. 그 부분에 있는 아주 작은 배수구에서 건물 내부 다른 곳에 피해를 주지 않고 물을 다 빼낸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춘분과 추분에 햇빛이 딱 맞춤으로 들어온다는 거대한 해시계. 햇빛과 달빛이 청동 벽면에 반사되어 만드는 영롱한 모습이 일품이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천사의 디자인이라 극찬했단다. 특히 라파엘로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자신의 무덤으로 택했다. 판테온의 청동은 군대의 대포로, 대성당의 건축재로 쓰이느라 다 뜯겨져 나갔다지만, 건물의 위엄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경이로움에 그저 낮은 숨을 토할 뿐이다. 



글이 넘 길어진다는 핑계로 이쯤 정리하자. 로마의 이튿날은 종일 바티칸을 누볐다. 입장을 위해 1시간 여 줄서서..라기 보다 줄에 앉아서 실제 본업이 고고미술사 연구라는 가이드님 설명을 들었다. (고마운 대박이라고나 할까)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예습한 덕분에 더 재미나더라.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용'부터 '아테네학당'.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 천장화(그 유명한 아담의 창조를 비롯해 설명도 기막히고 실제 보면 경이롭다), '최후의 심판', 라오콘상과 미켈란젤로 피에타까지... 위대한 예술을 직접 보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경험인지. 



그림 혹은 예술에 취미 전혀 없던 내가 그림 좋은 걸 알게 된건...대학 때 가본 상뜨 뻬쩨르부르그의 에르미따쥬 박물관 덕분이다. 난생 처음, 자발적으로, 여유 있게, 하염 없이..즐겼다. 많이 볼 생각 않고 좋은 그림만 실컷. 루브르, 오르세도 그렇지만..바티칸 투어는 오랜만에 그 즐거움을 되살려줬다. 
평소 굳이 미술을 찾아 가서 보는 수준은 아니지만..이렇게 기회가 닿을 때 좋은거로 내게는 족하다. 미술 교육, 그림 보고 화가 이름 짝짓기 하는 식으로 외우는게 아니라.. 그저 이런 느낌만 만끽해도 좋을텐데. 사연 한 자락을 구경하면 줄줄이 호기심으로 파고들텐데...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 자체로... 너무 대단해서, 종교의 힘을 다시 생각했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압도되어 버리니, 오히려 조금 정신이 드는 기분. 


나는 쉬운 여자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울컥한다. 포로 로마노, 판테온, 카타콤베, 시스티나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개인적으로 최고의 절정은 판테온이었지만 로마의 매력은 실체적으로 남은 유적보다 그 철학, 법, 문화 등 문명 그 자체의 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던 그 시절의 일상. 시대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버리는 예술.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나 라파엘로 같은 노력형 엄친아의 스토리를 비롯해 정치와 종교, 문화의 히스토리. 

내가 쉬운 여자라 다행이다. 여행에서 작은 자극에도 크게 흔들렸고, 짧은 찰라도 충분히 즐거웠다. 몸은 강행군에 지쳤지만, 마음은 좋은 느낌으로 충만해졌다. 이 행복, 이렇게 기록을 남겨놓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