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파리>둘이 만나면 사랑을 하고, 셋이 모이면 혁명을 한다는

마냐 2013. 8. 18. 02:33

둘이 만나면 사랑을 하고, 셋이 모이면 혁명을 한다는 나라. <먼나라 이웃나라>의 소개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는, 이 도시는 혁명을 지독하게 사랑한다. 혁명에 자부심이 까칠하게 높다. 고작 3일 밤을 파리에서 보낸 처지에 말을 보태기 어렵지만, 내게 남은 느낌도 혁명의 고향. 파리의 일정은 건축에, 미술에, 거리에, 아니 이 사람들 혼에 깊숙이 각인된 혁명의 역사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자유여행 다니는 이들을 위한 지식가이드 '유로자전거나라'. 루브르 1일 투어 코스. 수박 겉핥기를 우려했지만, 역사와 문화를 넘나드는 가이드님 덕분에 정말 좋았고... 저 소제목들을 보면, 파리 투어가 곧 혁명사 투어란게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 젊음과 지성의 라땡지구 생미셀광장 
- <비포선셋> 9년만의 설레이는 만남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 800년 역사의 흔적, 콰지모도의 사랑 노틀담성당 
- 그곳에 가면 다시 파리로 포앵제로 

- 십자군 원정과 생샤펠성당 
- 프랑스 대혁명의 위엄 최고재판소,콩시에르쥬리 

- 클래식의 대명사, 세계 3대 박물관 루브르박물관 
- 내가 원하는 대로! 맛있는 점심식사 

- 혁명의 시작점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바스티유 광장 
- 파리지앙 비밀의 장소 보쥬광장,마레지구 
- 시민들의 휴식처 파리시청 

- 혁명을 넘어 화합으로 콩코드광장 
- 왕족의 산책로에서 세계인의 산책로로 샹제리제 거리 
- 문화강대국 프랑스의 진입로 개선문 

3분짜리 설명으로 지나친 곳도 있고, 2시간 가까이 머문 곳도 있고. 오전 8시4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가이드님은 짧은 휴식 외에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목대로,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혁명의 자취를 따라갔다. 

노트르담 성당은...아름다웠다. 화려한 외부와 달리 내부의 공기는 경건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비롯해 이 나라 역사를 품고 있는 그 위엄. 12~14세기 건축물에 감탄하다가 19세기 증축 당시인지, 무튼 이후에 추가된 작은 조각상에 눈길이 머문다. <노트르담의 꼽추> 주인공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저 벽에 있다. 위대한 작품에 대한 시민들의 작은 기념물. 약자에 대한 연민을 놓치 않은 빅토르 위고의 아우라까지 슬쩍 얻어낸 한 수. 그러나 너무 작았다. 오른쪽 사진 삼각형태의 지붕 왼쪽 아래에 까만 점이 콰지모도다. 

도시를, 건축을 구경하는 것은 관광객의 의무겠지만, 이 도시는 역사와 문화의 존재감이 어디든 또렷했다. 작년 말 이후 한국인들의 완소작가로 등극한 빅토르 위고가 이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낸 작품들의 휘광이 이어졌다. 

최고재판소는 그저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었을 뿐이다. 그런데 설명을 듣다보니, 역사의 냉정함에 소름이 돋는다. 하는 일이라고는 자물쇠 따기, 벼룩 길들이기 취미 뿐이었던 무능한 왕 루이16세. 시민과 공감하지 못한 죄를 물어, 아니 전쟁 당시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에 따라 사형된 왕. 최고재판소에서 그의 사형이 결정될 당시 원안은 찬성 387, 반대 344. 불과 수 십표의 마음이 운명을 바꾸었다. 함께 갇혀 아랫층 아이의 비명을 들어야 했던 마리 앙트와네트는 하룻밤새 백발마녀가 됐다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문제적 발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국인 왕비에 대한 음해였을 가능성이 높다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죄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혁명의 후일담은 늘 피비린내로 이어진다. 무바라크 독재 종식 이후 이집트가 겪는 고통도 가혹하지 않은가. 마침 파리에서 만나기로 했던 옆지기의 후배이자 특파원이던 P는 127명이 숨진 7월 27일 '피의 토요일' 취재를 위해 급파됐다. 프랑스 대혁명 그 이후를 보여주는 그림의 메시지에 편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루브르에서 만난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사빈느의 여자, 1799>. 로마인들이 약탈한 여자들을 되찾기 위해 몇 년간 절치부심한 사빈느의 남자들이 공격했다. 이미 로마인의 아이를 낳고 기르던 여자들은 아버지, 오빠가 남편과 싸우는 가운데 중재에 나선다. 혁명 이후, 분열된 프랑스의 유혈 투쟁에 다비드가 그림을 통해 나선 중재의 메시지.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지~"라는 소리 없는 외침. 유로자전거나라 박영희 가이드님은 다비드 작품을 비롯해 여러 그림에 쓰인 색과 빛, 구도, 배경과 사연에 대해 설명을 기막히게 해주셨다. 어느 하나 그냥 넘길 구석이 없더라. 
 



피투성이 혁명을 이뤄냈어도, 역사는 부패와 무능력함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9>. 무능한 낙하산 선장이 이끌던 메두사호가 침몰하자 400여명 중 고위 관료들이 먼저 구명정으로 옮겨타고 149명은 뗏목에 의지하게 된다. 구명정과 뗏목을 잇던 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끊기고 13일 만에 발견된 뗏목의 생존자는 15명. 폭동을 거쳐 인육으로 버틴 죽음의 시간들. 낙하산 선장은 로비에 나섰고, 프랑스 지도층은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제리코가 정부의 실책을 비판하고 비극을 알려낸 이 그림에 루이18세는 불쾌해했다. 그림은 혹평을 받았단다. 



루브르 박물관은 비너스나 모나리자도 굉장했지만, 이런 그림들의 사연에 숨이 차분해졌다. 혁명에 성공하고, 혁명에 피흘리던 이야기, 탄압과 고통을 묵묵히 담아낸 작품들. (다음날 오르세 박물관을 돌아봤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또 다른 종류의 감동이 있었지만 일단 생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니케. 나이키 브랜드가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나온 걸 처음 알았다. 그리스 땅에서 기원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 누드가 아니라 옷이 얇아 배꼽이 드러나는데, 옷자락의 흐름, 몸의 형태가 살아 움직인다. 루브르는 전시 노하우가 갑이라더니, 계단 정상 위에 자연 채광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니케의 위엄이라니. 인류 문명은 이미 수천 년 전에 경지에 올랐거늘, 그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왔는가. 



바스티유 광장. 이제는 카페가 되어 버린 감옥이지만 바스티유 습격사건은 혁명에 불을 붙였다. (1789) 당시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 루소였단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계몽해준 철학자. 불평등한 차별이, 잘못된 분배가 말이 왜 안되는 건지, 그때까지 누구도 얘기하지 못했다니. 인류는 기원 전에도 저런 문명을 자랑해놓고.. 너무 오래 암흑기, 중세에 갖혀있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효과적 통치 체제였다고 해야 하나. <먼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편에 보면, 로마인들도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뭔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 평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호민관 제도를 도입한게 이미 기원전이건만. 

바스티유 자리의 카페에는 요즘도 나이드신 학자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광장 저 편의 집회가 말이 된다 싶으면.. 힘을 실어주러 달려가신단다. 사람들을 일깨워온 지식인의 전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종일 혁명의 함성이 상상되는 투어를 마친 다음날, 우리는 베르사이유로 갔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전설의 만화를 접한게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을까? 내 기억의 그 궁전은 그게 전부이건만. 그 화려함과 스케일에 감탄과 경악이 이어졌다. 

부의 95%를 차지했던 귀족들이 세금도 내지 않던 그 시절. 
태양왕 루이 14세는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푸케가 6000명의 하객을 집으로 초대하자 발끈, 그의 전재산을 몰수한 뒤 누구도 도전하지 못할 왕의 권위를 위해 베르사유 궁전을 만들었단다.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당시 다이아몬드 보다 귀하다는 거울을 73m나 벽으로 바른 사치의 결정체. 누구든 저 화려한 권세에 압도되었다는 저 공간. (사진에서 왼쪽이 거울이다) 




그 와중에 정원의 나무를 온갖 큐빅 모양으로 다듬으며 삐죽 가지라도 솟았다가는 정원사가 처형당하는 공포 정치까지. 해도 해도 너무한 상황에서 파리의 시민들이 굶주리는 백성에게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며 베르사유 궁으로 달려간 건 필연이었을까?

(그런데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 중 하나는 베르사이유의 엄청난 정원을 걷고 걸어... 연못? 운하가 나온 잔디밭에서 잠시 뒹굴뒹굴 멍 때린 것.. 그 다음 멍은.. 베른의 대성당 뒷마당에서, 또 아레강에 발 담그고 잠시 여유를 즐겼는데..엄청난 깨달음보다 훨 좋은게 멍 때리는 시간이란걸 깨달았다..ㅋㅋ) 

첫날 투어에서 마지막으로 개선문을 가기 전에, 샹제리제 거리를 지나기 전에 그 앞에 멈춘 콩코드 광장. 이름부터 사실 역사다. 루이15세 광장이라는 이름에서 대혁명 이후 혁명 광장으로 불렸던 곳.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그 광장. 혁명 이후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까지 처형당하면서 피의 역사가 이어지자..다시 화합, 통합을 이야기하며 콩코드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저 광장의 오벨리스크(이집트에서 걍 가져온거라는) 앞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판이 깔려 있다. 이 광장의 역사. 읽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에 처형 날짜가 나오는 국왕 부부의 이름은 알아보겠다. 

바스티유 습격일을 따라 만들어진 혁명 기념일(7.14)에 파리 시민들은 하루 종일 거리에서 집회와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이날 프랑스 대통령의 지정석은 바로 이 표지판. 지배자가 국민의 뜻을 외면했다가 사형당한 바로 그 곳. 국민이 부여한 권력에 겸허해야 한다는, 폭정과 실정에는 언제든 국민이 냉정하게 불러낼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바로 그 자리에서 기념 행사를 가진다고 한다. 




이런 파리의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박 겉핥기라도, 이렇게 엿본 그들의 히스토리는 근사하다. 

이번 여행의 출발을 파리로 잡은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건.. 여행 다음 일정이 이어지면서 확실히 알았다. 우리는 파리에서 3일 밤을 보낸 뒤, 차를 빌려 남쪽으로 내려갔다. 베른에서 1박, 인터라켄에서 1박, 그리고 피렌체에서 2박, 로마에서 3박. 가족 첫 유럽여행은 눈 딱 감고 돈 쓴 보람이 넘친다. 

마지막 컷은 루브르 야경. 니케 사진과 베르사이유, 이 사진의 저작권은 옆지기에게 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