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지난 가을, 덕분에 따뜻했어요

소박한 리뷰/비소설 2012. 9. 18. 22:35

구본준님의 맛깔스러운 서평. 너무 예뻐서 부럽고 부러운 인연.

서평을 읽다가 불현듯 이 책이 떠올랐습니다.

처절하고 뜨겁고 미칠 것 같은 사랑이 아니어도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일은 여러 갈래로 퍼집니다. 마음을 나누면서 내 생각이 커져가고 막연한 상상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면 그 이상 좋을 수 있을까요. 더구나 좋은 글에 담긴 차분한 마음은 대할 때 마다 설레일 것만 같아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그 자체를 갈망합니다. 

온전히 몰입하고 들어주고, 머리 속에 무질서하게 들어앉은 아이디어들을 그 소통과 공감 속에 다듬고 닦아 내는 과정을 그려봅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세상의 어떠한 분류에 속하든 간에 내 삶이 더 빛날 것만 같은 욕심이 납니다. 의미 있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느낌..

늘 꿈꾼다는 것은, 그만큼 만나기 쉽지 않은 인연. 그래서 이런 책에 끌리나봐요. 아래 독후감은 2009년 겨울에 남겼습니다. 옛날 글을 보면 부끄럽네요. 무튼, 이 책을 선물해 주셨던 L님, 그 이후로 못 뵜는데 모쪼록 건강하게 좋은 작업 하고 계시기를.

 

 


채링크로스 84번지

저자
헬렌 한프 지음
출판사
궁리 | 2004-01-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저자 헬렌과 런던의 중고서적상의 20년동안 주고 받았던 마음 따...
가격비교

 


L님. 

붓펜으로 쓰신거 맞죠? 한 획 마다 힘이 넘치는, 너른 한지에 쓰신 짧은 편지, 감사했습니다. 회사 일, 책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풀어낸 간단한 몇마디인데,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건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가 전해준 온기와 사실 비슷해요. 

뉴욕의 가난한 극작가 헬렌, ‘희귀한 고서’를 구하기 위해 뜬금없이 런던의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스 서점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는 시작됐죠. 살짝 정중한 서점 직원 도엘의 답신, 은근 비꼬는 헬렌의 도발, 슬쩍 속내를 드러내면서 예의바르게 마음을 여는 도엘, 이렇게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은 세월이 20년! 

이미 오래전 영화로 만들어진게 당연해요. 사연이 참 예뻐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이 편지로 주고받는 즐거운 말들은 으쌰, 힘나는 약 같아요. 


하지만, 이 책에는 이렇게 빤한 감탄만으로는 담아내기 아쉬운 온기가 있습니다. 그저 이 책 좀 구해주세요, 아, 찾아볼께요, 아 지난번 책 구해줘서 고마워요. 음식 좀 보내요... 희귀본 애서가와 대서양 건너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서점 직원의 이야기를 읽는데 왜 이리 설레는 겁니까.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랄까, 삶을 사랑하는 자세랄까, 그들의 본질적 상냥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더군요.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서로를 깊이 배려하는 ’벗‘을 가진 그들의 편안함이 느껴지더군요.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 오랜만입니다. 더 감동적인 책 더 재미난 책, 더 유익한 책 적지 않지만, 이 책은 퍼석거리는 속살을 촉촉하게 감싸주더이다. 그저 유머 감각과 책 사랑, 혹은 인류애(?)를 가진 사람들의 편지 왕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텐데, 포근한 여운이 길게 남더이다. 


어쩌면, 저 역시 이런 책을 '근사한 편지’와 함께 ‘선물’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딱 한번 뵌 L님을 잘 알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일단 서로 책으로 ‘통’하며 같은 느낌을 나누는 기분 같은 거, 참 괜찮네요. 고백하면, L님으로부터 이 책을 받고,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이후, 한동안 여기저기 책 선물 꽤 했습니다. 책으로 나누는 마음이 너무 좋았다고 해두죠. 마치 뽕 맞은 것 처럼 붕붕 뜬 기분으로 책을 나눴습니다. 

또 편지. 저는 L님 같은 달필과 아주 거리가 먼 악필가인데다, 우표 붙여 부치는 행위까지 하기엔 게을러서..대신 메일 많이 썼어요. 원래 사적인 메일 여기저기 많이 쓰는 편인데, 문득 보니, 제가 무언가를 갈망하듯, 미친듯이 메일을 써대고 있더군요. ^^; 사실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와 ‘일곱번째 파도’를 읽은 이후 더 즐겁게 쓰고 있던 참이었죠. ‘레오’같은 특정한 대상 없이 온갖 지인들에게 쓰는게 다를 뿐. 하여간에 에미와 레오 뿐 아니라, 헬렌과 도엘의 행복에 전염된듯, 몇 분들에게 메일을 썼습니다. 게다가 책을 선물하면, 책들이 돌아오더군요. 즐거운 마음들도 돌아옵니다. 저는 더욱 으쓱해서 다시 책을 골랐습니다. 온갖 메일엔 너무 ‘수다’를 많이 떠는게 찔릴 정도였어요. 


그렇게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전해온 온기에 취해, 지난 가을을 보냈습니다. 

여느때보다 한결 부드러운 제 마음이 조금 뿌듯했던 가을이었어요. 어느새 쏟아지는 일에 치여서, 책과 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살짝 시들해지긴 했습니다. 가을이 지나갔기 때문일까요. 아니, 계속 그러다간 재정 압박도 있겠죠. ㅎㅎ 그러나 이 작은 서간집에서 얻은 행복한 경험들은 잘 챙겨놓을께요. 고맙습니다. 꾸벅. 

(2009. 11)

 

 

(책의 무대, 채링크로스 84번지랍니다..ㅎㅎ)

Trackbacks 0 : Comments 1
  1. ghd 2013.07.15 13:03 Modify/Delete Reply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있으면,나는 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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