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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리뷰/비소설

<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속고 살아온 불편한 진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저자
토머스 게이건 지음
출판사
부키 | 2011-10-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미국과 유럽, 어디가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일중독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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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노동조합이 주는 장학금을 받았어. 독일에서는 장학금을 가장 많이 주는 곳이 노동조합이야. (장학금? 학비 공짜 아닌가요?) 아, 독일에서는 장학금은 생활비야. 약간의 학생회비 정도 내긴 하지만 학비는 물론 공짜고, 생활비는 받아야 하잖아."

"만약 내가 전업 블로거고, 별다른 수입이 없다면 정부가 수당을 줄거야. 창작하는 예술가를 위한 지원제도인데, 다른 수입이 별로 없다는 것만 입증하면 돼. 무엇보다 4대 보험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지원해주니까, 최소 생활비만 받고도 원하는 작업들을 해나갈 수 있어. 적당한 월세를 구하면, 집주인이 함부로 값을 올리거나 내쫓지도 못해." 

독일에서 10년간 공부한 K 선배. 듣다 보니, 어이가 없다. 독일이 그렇게 살기 좋은 곳? 놀라움과 당혹감은 한국 사람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닌 모양이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 시카고의 노동 전문 변호사가 독일 얘기로 책을 썼다. 원제는 'Were you born on the wrong continent?', 부제는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다. 불과 몇 개월, 독일을 경험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받은 충격(?)을 조목조목 전한다. 한국에 일중독 아닌 이가 있던가. 비슷한 느낌으로 공감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독일의 몇몇 주에서는 대학 등록금이 무료이고, 부과하는 경우에도 연간 수백 유로, 즉 미국 사립학교의 하루치 수업료 수준이라는 것에 저자 만큼이나 속이 쓰리다. 그리고 K선배 얘기를 들을 때의 느낌처럼 구구절절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진다.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삶의 질은 하락한다. 유럽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500시간 정도. 미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인데, 실상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2300시간 이상 일한다.. 겉으로 보면 미국은 엄청난 선진국.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GDP 증가분의 3분의 2 이상이 부자에게 돌아갔다. 속빈 강정. 유럽 각국은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낮지만 '중산층'은 교육, 의료보험, 제비꽃 만발한 도시 등 공공재를 무료로 향유.. 유럽인이 누리는 6주 휴가의 가치를 금액을 환산할 경우, 유럽인 1인당 GDP는 대폭 올라가게 마련. (32~34쪽)

1인당 GDP의 허실. 냉방과 난방을 유지하느라 미국은 석유와 석탄, 물 등을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데 그것이 고스란이 GDP에 반영된다. 노스웨스턴대 교수 고든은 이렇게 묻는다..늘 에어컨을 켜야 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진짜로 부유한 것일까?..미국인이 효율적이었따면 경제는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미국인은 마구잡이로 개발하고 무한정 이동하며, 대형 쇼핑몰에서 낭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교통체증 때문에 내가 차 안에서 갇혀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미국의 GDP는 그만큼 늘어난다...미국인 대다수는 실질 생활수준이 하락하는 것도 모자라 빚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따. 약한 정부, 낮은 세율에서 비롯되는 낭비와 비효율이 '성장'을 촉진하고 있으니.. (80~81쪽)                                                                                                                                          


모두가 일중독, 오히려 일자리를 줄인다

잘 사는 나라를 어떤 기준으로 줄 세울 것인가. 흔히 사용하는 지표에는 함정이 숨어 잆다. 오래 많이 일할 수록 GDP는 늘어난다. 전경련이 휴가, 즉 쉬는 날 늘리는데 결사반대 하면서 위기만 얘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7년 기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2000시간 이상 일하는 나라라는 인상적 보도를 기억한다. (이 기사다 : 월화수목금금금 그대에게 嫩置步地末考休暇街懶 [눈치보지말고휴가가라])  독일(1353시간)과 일본(1808시간)은 물론 폴란드(1953시간)에도 비할 바가 아닌 독보적 2261시간! 노동시간을 연간 300시간만 줄여도 일자리 200만개가 나온다는데 하여간. 우리도 이제는 온 힘을 다해 일하는 것으로 경제 지표를 자랑할게 아니라 행복지수를 따져야 할 때 아닐까. 미국만 따라해서야, 답이 안 나온다. 


그렇다면 엄청난 세금 차이일까. 저자에 따르면 미국인은 
유럽인이 내는 세금의 5분의 4 정도를 세금으로 내지만, 되돌려 받는 것은 유럽 복지국가의 5분의 4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세금이 문제가 아니라 정책이 문제란 얘기다. 저자는 "우리가 낸 세금의 일부만 되돌아오고, 대부분 사악한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회사, 응급 병원의 의사와 경영진 수중으로 들어간다"고 개탄한다. 공공재가 되어야 하는 것을 중간에 가로채 폭리를 취하는 구조. 비효율적이라는 독일 의료보험도 관련 총 비용이 GDP의 11%인데, 미국은 이 비율이 17%. 그런데도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 보험에 가입한 중산층도 종종 혜택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독일은 공공재 민영화를 제한, 공공재를 통한 부당이득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에서는 기업이 이윤을 위해 건강, 교육 분야도 손대지만, 독일에서는 어렵다. 공공재를 효율적으로 분배하는데 성공한 유럽 시스템을 저자는 사회민주주의라 부른다. 


아이를 키우는게 무료라면...연봉 묻지 않고 사람을 사귈 수 있을까

책에는 록 음악 평론가 친구 얘기가 나온다. 미국 여자들은 만나면 얼마 버느냐부터 묻는게 당연한 현실. 4명 중 1명이 빈곤 아동인 현실에서 자식 굶기지 않으려면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프랑스 여자들은 최소한 그게 첫번째 질문은 아니란 거다. 프랑스 여자들은(독일이나 프랑스나!) 정부에 가정을 꾸리는 본능(nesting instinct)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기본권. 자녀양육비도 지원받고, 교육비는 무료다. 미래의 남편이 얼마 버는지에 집착않고 최소한 록 음악 평론가와 만나 데이트할 여유는 있다. 

예컨대 시카고의 바바라라는 여성은 아이를 키우는데 사립고(4년간 4만7200달러), 사립대(뉴욕대 4년간 16만달러), 로스쿨(3년간 13.5만)까지 보내면 총 34만달러가 든다. 과외 비용은 뺀거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사벨에게는 보육비가 전액 지원되는데, 지역 보육원에 자리가 없으면 별도 수당이 나오는 수준이다. 저자는 "미국인은 사회 안전망에 별반 관심이 없다. 바버라나 이사벨 중 누가 더 행복한지 아무 생각 없다"고 토로한다. 왜? 경쟁에서 이기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최근 복지 논쟁이 뜨겁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보육비, 교육비를 모두 정부가 책임지는 구조가 되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이 떠드는 분도 있다. 혹은 저자의 지적처럼, 경쟁하느라 바빠서, 저런 얘기 꺼내면 빨갱이로 몰릴까 귀찮아서, 얘기를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렇게 하고도 독일은 2003~2008년 수출 총액 세계 선두를 지켰다. 13억 중국, 3억 미국 아니라 8300만 독일이 세계 수출 선두라는 거다. 저자는 외친다. "중국인과 미국인은 휴가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일만 하는데...독일인은 1년에 6주 휴가 누리면서!" 

힘 센 노동자, 기업과 나라가 망하기는 커녕 더 잘됐다는 '불편한 진실'

미국의 기준에서 볼 때 독일 노동시장은 결코 유연하지 않다. 대기업조차 감독이사회 절반은 노동자 몫. 그런데도 막강한 경쟁력. 독일은 어떻게 승승장구하는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사회민주주의 덕택이다.. 1970~1990년대 영국과 미국, 신자유주의자는 유럽의 사민주의자 조롱했다. 노동조합 파괴해야 산업 살릴 수 있다고 했다. 미국과 영국이 바로 그렇게 했다. 비용 면에서 경쟁력을 지녀야 한다면서 노조를 파괴. 그 결과 어떻게 됐냐고? 단기간 내에 산업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 스웨덴, 프랑스는 노동조합 무기력화하는 대신 높은 노동비용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산업구조 재편... 노동비용 높은 독일은 제조업 경쟁력이 더 강화되는 반면, 노동비용 너무 낮은 영국과 미국은 제조업을 버리고 말았다. (133쪽)

책은 2010년에 출간됐다. 독일과 미국의 경제 상황이 또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따져볼 일이다. 최소한 애플과 구글 처럼 IT에서는 미국이 승승장구 하고 있으니. 그러나 양질의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하는 제조업의 현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최소한 미국과 영국에서 자동차 업체들이 망하거나 문을 닫은 반면, 벤츠, BMW, 폭스바겐 등이 건재하니까. 숨겨진 '불편한 진실'은 더 있다. 1973~2005년 미국 노동생산성은 55% 상승했는데, 시간당 평균임금은 오히려 8% 하락했다고 한다. 이런 문제로 미국인들은 싸워본 적이 없다는데 무튼. 실업률은 미국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지만, 1994년 미국 노동부는 "대졸자가 과연 학력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갖고 있나"를 조사했는데, 5명 중 1명은 고졸자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조사는 두번 다시 실시되지 않았단다. 하여간에.

더구나 미국에서는 노동시간에 관한 사회계약이 없는데다, 연장 노동을 거부하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 아무리 긴 연장 노동도 마다않는 이들이 많은 탓이다. 그러나 연금, 의료보험, 교육 등 모든 기본적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는 사회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연장 노동은 삶의 질을 낮추는 것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 이게 가능할까? 독일의 노동조합과 직장평의회는 매우 흥미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기업이 키워내는 '참여 시민'

1000명 이상 고용한 기업의 의무사항인 기업 직장평의회. 노동자 가운데 선출직으로 뽑혀 직장 내 각종 규칙을 만드는 일에 관여하며 진정한 자치를 경험한다. 회사와 정부는 직장평의회에서 회사와 협상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훈련까지 시켜주는데 적잖은 비용을 들인다. 저자는 "독일 전역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미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지도자 될 기회"를 얻는데 주목한다. 이런 직장평의회 당시 규모가 50만명. 평생하는 것은 아닐테니 후임까지 감안, 100만명이 직장평의회 의원을 경험한다고 치면, 전체 인구 8300만명 중에 적잖은 수. 이들이 TV만 보는 '소극적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 활동가'로 키워진다는데 저자와 같은 충격을 받았다. 노동자로서 권리를 인식하고 실제 참여하는 이들은 시민의 권리 또한 허투루 버려둘 리 없지 않은가. 청년 투표율 20%대라는 우리 사회가 꼭 참고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확실히 노동자 힘이 센 동네다. 현장 노동자도 노사공동결정제도 덕분에 기업 경영 관련 정보 줄줄이 꿰고 있다. 경영자는 노동자 동의 안해주면 경영 어려움 가중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함부로 행동 못한다. 오너의 2세에게 빵집을 차려주고 수익을 더 내도록 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독일은 기업평의회 합의 없이 인력 구조조정도 불가능하다. 부득이한 경우 해고수당이 지급된다. 공장 해외 이전은 거의 불가능하며 파산법 강화로 대기업 철수도 어렵다. 공장 이전으로 줄줄이 해고되어 크레인에 올라 목숨을 던지고, 대책 없는 대량 해고로 인해, 22명이 자살하는게 오히려 비현실적이지 않나.

노동자의 권리를 우선하는 사회. 정말 사고체계가 다른게, 독일 금속노동조합 노동자 중 외국인 비율이 베를린의 경우 42%에 달한다고 한다. 독일 전체로는 8~9%. 외국인 노동자조차 노동조합의 일원으로서 똑같은 권리를 누릴 뿐더러, 당연히 동일 임금을 받는다.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가 외국인 노동자를 어찌 취급하는지, 굳이 따지는 것도 부끄러울 뿐이다. 독일 노조는 기업이나 산업 전반에 될 수 있으면 많은 노동자 임금을 동일 수준에서 정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이 최대한 적용되도록 지역별임금결정제란 제도도 있단다. 이런 환경이라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와 스펙에 목숨을 걸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날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눈길 더 간 얘기는 징병제다. 독일도 9개월 의무복무제가 있던 나라다. 입대자 60%가 군인으로 현역 복무했고, 40%는 사회봉사 등 대체복무를 했단다. 통일 이후 2010년 의무복무기간은 6개월로 단축됐고, 2011년 7월 징병제가 폐지됐다. 대체복무제를 하면 감옥가는 나라에서 뭔 말을 하겠냐만. '당연한 권리'를 너무 많이 포기하고 사는게 아닌지.. '미친 듯이 일하고, 광적으로 경쟁에 매달리는 사회'가 정상이 아니라고만 생각할 뿐, '사람답게 사는 권리'를 갖지 못하는데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정상'과 '상식'이 아닌 것에 너무 매몰된 것은 아닌지.

'한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 아니다. 당연한 권리를 지켜내지 못한 탓이다. 공짜로 주어지는 권리는 없다. 문제를 인식했으니, 이젠 뭔가 해보는 수 밖에. 이 사회 지도층은 미국에서 배워온 것들이 최고인양 못 배운 이들을 나무랬지만, '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란 얘기까지 나왔다. 그것도 잘난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께서 통탄하며 고백했다. 노동자 권리, 시민의 권리가 높아지면 마치 나라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국내 편협한 언론에 그만 속아줘도 되겠다. '불편한 진실'을 바라보면,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른다. 그 사회, 왜 문제가 없겠냐마는 독일이 일단 너무 부럽다. 

 

책은 강추. 이 저자, 글을 너무 재미나게 써서, 빠져버린다.

K선배에게 "사실과 다른거나 너무 과장한건 없느냐"고 걱정되어 물었을 정도.

장기 체류자 눈에야 아쉬운 것도 보인다지만, 틀린 말 없단다.